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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an 20. 2024

럭키식자재 할인마트와 너의 미소

1.

  퇴근길에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농구대 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노을을 찍는다. 매일매일. 작은 마을길을 걸어가며 약국과 다방, 식당과 옷가게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해본다. 어느 날은 조금 멀리까지 걸어가 항구의 밤바다와 물결을 오래 바라보고 거센 바람과 파도 소리를 귀에 담아 오기도 한다.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럭키식자재 할인마트에 들러 우유와 빵을 산다. 저녁시간에 마트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곳에는 하루의 고된 노동을 술과 밥으로 조금이나 풀어보려는 어른들과 엄마의 손을 잡고 나온 작은 아기들이 있다.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것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있다. 사람들은 많지만 질서 정연하고 고요하고 조용하다. 그들은 각자 일용할 양식을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게 사간다. 나는 다른 것은 사지 않고 저녁으로 먹을 우유와 빵을 산다.

  자주 가는 김에 그 마트에 이름과 번호를 등록해 두었는데 언제나 오전 8시에 문자가 온다. 신년맞이 특가세일로 콩나물 1박스가 2,580원, 애호박 1개에 1,950원, 정육 수산코너와 공산품 코너의 품목과 가격을 친절하게 보내준다. 나는 아침 8시마다 어김없이 오는 그 문자를 지우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럭키식자재마트의 문자가 마치 행운을 가져다주는 무엇인 것처럼.


  아직 어두운 아침, 학교 가는 길마다 맡게 되는 정비소의 연탄난로 냄새와 하얀 연기, 읍내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갑자기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환한 인사를 건네는 외국인 노동자, 운동장에 내린 아침의 안개, 학교의 오래된 돌계단, 바람이 펄럭이는 태극기, 이처럼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이 하루를 채우고 있다.      


  나는 최대한 간결하고 담백하고 소박하게 하루를 보내려고 한다. 작은 파문도 없는 조용한 날들을 지키려는 듯 나는 쉽게 들뜨지 않고 쉽게 꿈꾸지 않고 쉽게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작가 권여선은 소설 <각각의 계절>의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살면서 보니, 어느 시절을 살아내게 해 준 힘이 다음 시절을 살아낼 힘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다음 시절을 나려면 그전에 키웠던 힘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애거나 다른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힘은 딱 그 시절에만 필요했던 것인데 계속 그 힘으로만 살려고 하다가 추해지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죠. 우리가 한 생을 살아내려면 한 힘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시절에 맞는 각각의 힘들, 다양한 여러 힘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쩌면 나도 작가의 말처럼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을 길러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2.

  아이들이 졸업을 했고 학교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급식실 앞 벚꽃 나무보다 ‘사랑해 본 사람만이 사랑을 배울 수 있다’라고 쓰인 2층과 3층 사이 계단의 문장보다 교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과 함께 앉은 책상과 의자보다 학교 담장의 붉은 장미꽃과 체육관의 마루 바닥보다 운동장에 내려앉는 아침의 안개와 저녁의 노을보다 아이들을 늦게 만났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가장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 끝내 울어버린 아이의 마음과 그때 아이의 글썽이던 눈동자를 알고 있고, 학원에 갈 수 없어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던 아이와 아빠와의 마지막 식사를 기억하는 아이를 알고 있다. 일 때문에 바쁘셔서 2주 만에 집에 온 엄마, 하교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 들리던 엄마의 청소기 소리, 제일 좋아하던 엄마의 된장찌개 냄새. 아이가 항상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엄마를 알고 있다. 그것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하는 그와 그걸 말할 때 환해지는 그의 얼굴도 알고 있다.

  친구가 만들어 주었던 맛있는 파스타와 사주었던 탕후루를 알고 있고, 슬픈 날 복도에서 안아주던 친구들의 따뜻한 포옹과 교과서 가득 필기되어 있던 정직하고 성실한 글자들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입시가 뜻대로 되지 않아 기운이 없던 아이의 어깨와 발걸음, 또 그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그의 씩씩한 달리기도 기억하고 있다.   


3.

  그리고 겨울 어느 날, 교장실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연아와 송희. 담임 선생님께 너희들에게 문자 전해달라고 했는데 봤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내게 문자를 보여주고는 또 허리를 꺾으며 숨도 안 쉬고 웃기 시작했다. 나는 연아와 송희의 웃음소리를 알고 있다. "얘들아 졸업식 축사 때 잊었는데 핸드폰 번호는 010-0000-0000이란다. 언제든 연락하렴. 맛있는 먹으러 가자. 모두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행복하렴. 졸업 축하해."라는 내 문자를 전해주시면서 담임 선생님은 그 밑에 이렇게 적어두셨다. "라고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아이는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이었나 보다. 우리는 예비소집일과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언제든 맛있는 거 먹으러 같이 가자고도 이야기했다. 안녕 인사를 하고 걸어가다 나는 되돌아보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프지 마." 아이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웃어 보였다. '네 선생님, 네. 아프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아이들이 가고 아무도 없는 긴 복도에 한참을 서서 문득 내 마음에 일어나는 슬픔을 오래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랑과 함께 오는 애틋함과 아픔과 슬픔에 대해. 나는 이제 울게 될 것이다. 쉽게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그것만큼은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4.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이렇게 썼다.

   "진보는 현상 유지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평범한 사람들,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의 동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에게 일어나는 이 작은 파문과 동요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내가 어떤 일들에 뛰어들게 될지, 예전처럼 내가 어떻게 상처받고 아파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나는 아이들이 내게 보여준 눈물과 웃음에 응답하고 싶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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