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너여서 빛나는 너에게
도덕적 기준이 높은 둘째 아이.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어느 순간 강박처럼 너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폭풍 같은 세상 속에서 나는 혹시 너를 너무 잔잔한 호수처럼만 키운 건 아닐까.
소심하고, 늘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의 오래된 그림자를 너에게까지 물려준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밤마다 눈물로 자책했다.
모두가 뒤엉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사춘기의 바람이 너를 흔들기 시작하며 너는 언제나 불편하고, 긴장하며 살아왔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감기가 오면 약을 먹고 나아지듯이, 약을 먹으면 금세 괜찮아질 거라 믿었지만, 그건 결국 내가 혼자 붙든 조급한 희망이었음을 알았다. 첫 약은 오히려 너에게 전에 없던 깊고 낯선 어둠을 불러왔다. 급히 두 번째 병원으로 옮기고, 약을 다시 맞춰가며 너는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빛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불안이 우울로 번질까 두려워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무너지고, 일어서며 너를 살핀다.
ㅣ믿을만한 어른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식탁에 앉아 말을 꺼냈다.
"엄마, 이 세상에는 믿을 만한 어른이 없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학교 선생님도, 위클래스 선생님도 다 못 믿겠어요.
자꾸 관심 갖는 게 부담스러워요.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한 것 같지 않은데, 계속 물어보니까... 싫어요."
"그래? 그렇다면 지금은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때?"
너는 작은 입술을 꾹 깨물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에게는 믿을 만한 어른이 정말 한 명도 없어?"
"딱 한 명 있어요."
'엄마'라고 말할 거란 것을 내심 기대했지만, 다시금 확인하듯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
"엄마요."
"정말?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엄마도 너를 믿는데."
"엄마랑 대화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 말에 저 깊은 곳에서 전기가 번지듯, 심장이 찌릿하게 조여왔다.
짧은 문장 하나에, 그동안 쌓여 있던 걱정과 두려움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고마워... 엄마도 그래. 사랑해, 우리 수정이."
그러자 아이가 조금 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다행이에요.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크고 있어서.... 그나마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도 불안하긴 하지만요. 아..... 모르겠어요. 여전히 그냥 다 불안해요. 모든 게 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엄마 때문 아니에요. 제가 문제예요. 그냥 제가 이상한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언제나 따뜻하다’고 말하던 아이에게 더 따뜻하고 싶은 어른이고 싶어졌다.
눈앞이 뜨거워졌다. 아이가 건넨 작은 진심 하나가 내 가슴 깊은 곳까지 서늘하게 아리며 스며들었다.
"수정아, 전혀 이상한 거 아니야.
너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감각이 예민하고, 감정이 섬세해서
세상이 유난히 복잡하게 느껴질 뿐이야.
그걸 네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수정이.... 많이 힘들지?
지금도 애쓰고 있는 거 엄마가 다 알아.
여전히 불안하고 어려워도 그래도 아주 조금씩,
정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에 우리 의미를 두자.
네 옆에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엄마가 있잖아.
평생 이렇게 손잡고, 네가 좋아하는 예쁜 카페도 가고, 맛집도 가고...
그렇게 조용하고 따뜻한 행복을 함께 걸어가자. 응?"
좀처럼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던 아이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네.."
"애쓰지 않아도 돼, 수정아. 그냥 흘러가게 두자. 결국 다 지나갈 거야.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우리. 대충 살아도 괜찮아."
"....."
"정말 다 괜찮아."
아이의 작은 손 위에 내 손을 살며시 얹었다.
"네."
짧은 대답 너머로 나는 너를 느꼈다. 조금씩 다시 숨을 고르는 너를, 조금씩 숨통이 트여가는 우리를.
너의 앞에서는 언제나 담담한 어른이 되려 애썼지만 사실 나는 늘 불안하고, 금세라도 금이 갈 것 같은 유리 같은 나약한 어른이었다.
대체 무엇이 너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왜 하필 우리 아이에게 왔을까.
가슴에 유리조각 하나가 깊게 박힌 듯 아리고, 아프고, 불안하고, 두렵다.
너의 불안을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불안을 나에게 옮겨 달라고 밤마다 조용히 기도했다. 차라리 내가 더 아프겠다고, 제발 우리 아이에게만은 이러지 말아 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도 함께 큰다. 아니, 어쩌면 더 작아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또 무너지기를 반복하며 비로소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을 늦은 밤의 기도처럼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다.
언젠가 너의 세상이 조금 덜 흔들리고 너의 마음이 너의 속도로 숨을 돌릴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끝까지 너에게 믿을 만한 어른으로, 어둠이 밀려올 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작은 불빛이 되고 싶다.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다. 그저 네가 내 곁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어 준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엄마의 하루는 다시 따뜻 지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오늘은 소리 내지 않고, 네 이름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쓰다듬듯 부르고 싶다.
너라는 존재가 아무 말 없이도 세상을 밝히는 엄마의 포근한 온기라서, 너를 떠올리는 순간 내 안의 어둠마저
조용히 옅어진다.
존재만으로 빛나는 우리 딸에게.
수정아, 우리 아가. 우리 강아지.
엄마는 언제나 여기 있어.
숨이 가쁘고 세상이 버거워질 때면
그저 조용히 엄마 품으로 오면 돼.
네가 온전히 너인 채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가슴 깊이 감사해.
엄마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괜찮아,
정말 다 괜찮아.
말로 다 닿지 않는 마음으로,
우주가 품는 어둠보다 깊게
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