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날애 Nov 11. 2024

나를 미워하는 당신에게

사실 괜찮진 않습니다만

 ‘에코이스트(echoist)’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내 탓부터 한다.

유독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한다.

타인과의 갈등을 회피한다.

생색낼 줄 모른다.

경쟁을 싫어한다.

눈치가 빠르다.

확신이 없는 표현을 사용한다.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다.


당신이 이중에 다섯 가지 항목에 해당한다면, 에코이스트일 가능성이 크다.


에코이스트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용어로, 에코(Echo)라는 존재에서 비롯되었다. 에코는 아름다운 요정이었지만,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분노를 샀다. 헤라는 에코에게 벌을 내려, 에코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오직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에코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게 되었고, 단지 다른 이들의 말만을 되풀이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에코이스트라는 성격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타인의 목소리만을 반영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에코이스트는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지나치게 맞추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려 애쓰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에코이스트는 종종 자기비판적이고, 자신을 낮추는 경향이 있으며, 갈등을 피하기 위해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경쟁을 싫어하고, 때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인의 감정과 욕구에 너무 맞추려 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다.



열 가지 항목 중 열 가지를 모두 체크한 나는, 그야말로 지독한 에코이스트였다.

어릴 때부터 서른 살 중반까지, 배려라는 가면을 쓰고 갈등을 회피하며 살아왔다. 스스로를 비겁한 이타주의자라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엔 그게 옳은 선택이라 믿었다.

대한민국의 K장녀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나는 타인의 기대에 맞추려 애쓰며 살아왔다.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네가 우리 집의 가장이야"라는 말에 자라며, 배려와 희생을 미덕으로 여겼다. 그때는 그게 옳은 선택이라 믿었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새로운 삶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 배려가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갈등을 피하려는 습관이 내 삶을 점점 좁혀 갔다.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나요?"


나는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 진심으로 잘 지내고 싶었고,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저 배려하고, 맞추고,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갈등을 피하려고 무조건 참았다. 참다 보니, 그 사람의 밑바닥과 시기가 보였고, 그때마다 혹시 내가 문제가 있는 걸까 하고 스스로를 더 낮추며 고민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때 내가 선택한 평화는, 사실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회피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속이고 덮어두며 살았던 시간들을, 이제는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결국 대면할 결심을 했다. 그동안 나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나에게,
이제는 내 마음을 숨기지 않겠다고, 내 감정을 존중하며, 할 말을 할 용기를 가지기로 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용기도 생겼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삶을 찾겠다는 결심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미움을 받을 용기까지 포함된 선택이었다. 내가 미움을 받더라도 그것이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마음으로.






우황청심환을 한 통 꿀꺽 삼키고, 나는 그 사람을 마주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들킬까 봐 눈앞에 있는 커피잔조차 들지 못했다. 그만큼 떨리고 두려웠다.


“저, 싫어하시죠?”
의미 없는 말들만 빙빙 맴돌다, 나도 모르게 불쑥 입밖에 튀어나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 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저 다시 잘 지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더 이상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요, 다시 잘 지냅시다'는 말도,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저 “나 좀 그만 괴롭혀 주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는 그만 끝을 내었다.
그렇게, 나는 에코이스트의 삶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 맞추던 삶에서 벗어나, 내 감정과 욕구를 존중하며 내 삶을 돌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저는 괜찮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며 내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다. 무조건 회피만 했던 바보 같던 나도 이제는 상황에 직면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감정을 먼저 존중하며, 할 말을 할 용기가 생겼다. 내 삶의 중심에 나 자신을 두게 된 것이다.




개복치인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용기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제는 "왜 나를 미워하나요?"라고 묻는 용기는 생겼다. 그 답이 없더라도, 내겐 그 질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제 나는 내 감정을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의 감정일 뿐이다.



사실, 여전히 괜찮진 않습니다만, 나를 미워해도 쩔 수 없습니다. 그건 당신의 감정이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