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경단 Dec 12. 2022

'우리 가족'의 범위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12

요즘 제일 많이 들어가는 앱은 아마 인스타그램일 것이다. 한 때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거나 예쁜 카페에 가면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 사진처럼 찍어서 올려보기도 했는데 이것도 팔로워가 많고 댓글이 많이 달려야 재미있지, 아무도 보지 않는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냐 싶어 민경은 요즘 다른 사람들 사진 구경만 한다.


다들 잘 먹고 잘 산다. 명품도 턱턱 사고, 연애도 잘하고, 결혼도 잘해서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산다.

물론 핸드폰 속에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 저들의 삶의 일부는 어쨌든 화려하고, 어쨌든 행복하고, 어쨌든 부럽다.


대학교 때 어학연수를 갔다가 만났던 영국 출신 L의 인스타그램을 보게 되었다. L은 민경보다 두 살이 많았고, 얼마 전 결혼을 해서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결혼했구나. 발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L의 인스타그램 속 사진은 정말이지, 화보가 따로 없었다. 마치 일부러 나무를 심은 듯한 울창한 숲 속에서 최소한의 치장과 심플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올린 결혼식 사진, 남편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요가하는 사진, 폭포수 앞에서 비키니를 입고 찍은 만삭 사진, 동남아의 혜택이라 볼 수 있는 신선한 열대과일들까지...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 보였다.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게 산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마치 영혼의 짝을 만난 것처럼 보인다.

영혼의 짝을 만나면 싸울 일이 없을까? 행복하기만 할까?

그건 또 아니겠지?


결혼이라는 건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할 것 같아. 그러면 차라리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후회되면 이혼이라는 옵션도 있잖아. 물론 쉽진 않겠지만.

하지만 안 하고 후회하면 그땐 영영 못 하는 상황일지도 몰라.


너무 겁먹지 말자. 다들 결혼해서 사는데 뭐. 나 혼자 이상한 길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진 대리님이나 윤 과장님 얘기 들어보면 결혼하고 나서 시부모님과 관련된 것들로 남편이랑 싸우고 많이 힘들어하던데, 그 부분에 대해선 재훈 씨랑 확실히 얘기를 해 두는 게 좋겠어.

그러면 그나마 좀 덜 싸우지 않을까?



민경은 퇴근 후 재훈과 만났다.


“자기야, 우리 결혼하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어?”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결혼이라는 건 엄청난 거잖아. 이왕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아야 하잖아?”

“행복하게 살면 되지. 우리 지금까지 잘 만나왔잖아? 이것의 연장선이 되는 거야.”

“전에 얘기했듯, 나는 결혼한다고 해서 은행을 그만두거나 커리어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 자기도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라고 했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러면 집안일이나 육아도 동등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그런 건 걱정 마. 집안일은 각자 잘하는 부분을 주로 맡아서 하고, 서로 ‘내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하려고 하면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전에 얘기했잖아. 다림질은 내가 전담해서 한다고.”


재훈이 미소를 띠며 민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결혼하면 집안 행사라던지 챙길 것들이 많이 생길 텐데, 각자 집에 대한 건 알아서 잘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명절에 각자 집에 가자는 그런 얘기가 아니고, 아무래도 나는 자기네 집안 행사를 모르고, 자기는 우리 집안 행사를 모르니까 한 사람이 전부 다 맡아서 하기보다는 각자 나눠서 챙기고 일정 체크해서 공유하고 진행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다는 얘기야. 좀 회사 일 얘기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 나도 그건 좋을 것 같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지. 하하”


“그리고, 중간 역할 잘해줬으면 해.”

“회사에서 결혼한 분들이 많이들 얘기하더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제일 중요한데 그만큼 어렵다고. 특히 결혼하고 나면 와이프들이 시부모님이랑 관계가 어려워서 남편이 중간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하더라.”

“자기뿐 아니라 나도 잘해야지. 자기도 우리 부모님이나 우리 가족이랑 당연히 어색하고 어려울 거 아냐. 어려운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 혹시나 오해 같은 걸로 마음 상하지 않게 중간에서 역할을 잘해야 할 것 같아.”

“내 쪽 가족 관련된 일은 내가 주로 맡고, 민경이는 민경이대로 맡아서 하고. 그럼 되는 거 아닐까? 사실 중간 역할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난 아직 정확히 모르겠어.”


민경은 현서가 결혼 준비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득, 맘에 들지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골라주신 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현서의 C사 가방은 여전히 장롱 속에 처박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옆에서 눈치 없이 가격이 비싸다는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었던 현서 남편은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고 그렇게 현서의 속을 긁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궁금해졌다. 


또한 진대리의 남편이 시부모님에게 큰 의미 없이 한 말이 며느리에게 얼마나 신경 쓰이고 당혹감을 주는지, 그로 인해 시댁에 발길을 끊고 싶어 진다는 진대리의 이야기와 시어머니의 전화 스트레스로 괴로워했던 윤 과장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재훈은 민경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아마 모든 며느리가 결혼 후에 시부모님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야. 자기도 알다시피 장인어른 장모님과 갈등을 빚는 사위보다 시부모님과 고부갈등이 있는 며느리의 사례가 훨씬 많잖아. 사위는 백년손님이고 며느리는 그렇지 않다는 옛날 인식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하고, 난 그런 분위기 속에선 살 수 없어.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해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주변에서 힘들어하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으니 솔직히 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야. 의도치 않게 사이가 틀어지거나 고부갈등이 생기면 얼마나 괴롭겠어.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역할을 잘해주었으면 해.”


“우리가 결혼하면, 우리만의 독립된 새 가정을 꾸리게 되니까 앞으로 ‘우리 가족’이라 함은 나와 민경이가 되는 거야. 그리고 혹시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아이들까지. 결혼 후 나에겐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 가족이 제일 우선순위가 될 거야. 민경이도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나는 민경이를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고 챙길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물론 내가 서툴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가족’이라. 결혼을 하면 ‘우리 가족’의 범위가 바뀌겠구나.


결혼 전이니 아무렇게나 공수표를 날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얄팍한 의심이 드는 한편, 민경은 재훈이 결혼에 대해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해왔구나 싶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마음이 결혼하는 쪽으로 기울자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정신 차려보니 웨딩홀에 서 있더라’는 말이 뭔지 이해가 되었다.


민경과 재훈은 모은 돈을 합하고 대출도 받아 각자 회사의 중간지점에 작은 전셋집을 얻었다.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그리고 화장실 하나로 이뤄진 작은 집이었지만 두 사람이 살기엔 괜찮은 곳이었다.


작은 집을 신혼집으로 꾸미려니 가전 가구는 꼭 필요한 것들 위주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것들로 고심해서 샀다. 가진 예산 안에서 사려니 발품과 손품을 열심히 팔아야 했지만 즐거웠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덕분인지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발리로 떠났다. L의 인스타그램 사진에 매료된 민경은 울창한 숲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서 영혼의 짝을 만난 것이 맞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신혼여행을 발리로 간다는 소식을 전하자 L은 꼭 집으로 놀러 오라며 민경 부부를 초대했다. 민경은 선물용 과자세트와 한복을 입은 곰인형 한 쌍을 L부부를 위한 선물로 준비했고, 오랜만에 만난 L과 학창 시절 이야기도 하며 반가운 시간을 보냈다.


L의 남편이 직접 요리했다는 발리의 바다에서 잡아 올린 신선한 생선구이와 민경네가 면세점에서 사간 화이트 와인은 한국에서 온 부부와 영국에서 온 부부가 만난 발리에서의 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노랗게 익은 망고와 파파야, 망고스틴 그리고 이름 모를 달콤한 열대과일들은 디저트로 그 어느 것보다도 완벽했다.


민경은 작은 요람에 누워 모빌을 보며 놀고 있던 4개월 된 L의 아들과도 짧지만 즐거운 만남을 가지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을 꿈꿔보았다.


영원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행복하기만 한 허니문이 끝나고 민경과 재훈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멋진 시어머니도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