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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Nov 14. 2022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는 걸까?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08

같이 근무했던 동갑내기 직원인 현서가 상견례를 마치고 곧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남자 친구는 국내 최고의 대기업인 K전자에 다닌다고 했고, 들어보니 남자 측에서 40평대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해준다고 했다. 


지지배. 그동안 솔로인 척하더니 저런 부유한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었구나.


약간의 배신감이 느껴지는 한 편, 역시 예쁜 여자는 부자 남자랑 결혼한다는 정설이 발현되는구나 싶어 씁쓸했다. 현서는 누가 봐도 예쁘고 늘씬했으니까. 그에 비해 나는 평범한 걸.


내가 부유하든, 상대방이 부유하든 아니면 둘 다든. 어쨌거나 부유하면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으니 솔직히 현서가 좀 부러웠다. 결혼 후 어쩌면 은행을 그만둘 수도 있다고 한 말 뒤에는 부유한 시댁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부자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다 해도 은행을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든든할 것 같다.


“현모양처가 되어볼까 봐.”


현서는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 왠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현모양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보리색 앞치마를 두른 후 아이들과 남편의 식사를 제일 먼저 챙기고, 

모두가 떠난 빈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밑반찬을 종류별로 만들어 놓고, 

계절에 따라 쿠션 색깔을 바꾸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들의 속옷을 삶고,

남편의 와이셔츠를 착착 다려서 걸어놓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재잘재잘 이야기를 들어주며 놀아주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 가족들과 도란도란 맛난 밥을 먹고,

가족들의 고단했을 하루를 품어주고 잠자리에 드는 모습.


아,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든다.


왜일까. 민경은 자신의 모습과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매치되지 않았다. 그동안 살아오며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목표를 달성하는 성취감이 중요했고, 회사에서 더 눈에 띄고 높이 올라가고픈 야망만 있었다.


집안을 살뜰하게 돌보는 건 왠지 자신 없어. 더군다나 다리미질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인걸.

역시 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걸까. 그렇지만 언젠가 결혼은 하고 싶은데.

꼭 살림을 잘할 필요는 없겠지? 잘해야 하나?


동갑내기인 현서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이때, 현서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을 꺼냈다.


“사실 예비 시어머니가 결혼 후 은행 그만두고 남편 내조만 하는 게 어떤지 말씀하셨어.”

“아, 정말? 요즘도 그런 분이 계시단 말이야?”

“나도 깜짝 놀랐어. 물론 힘들 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한데 요즘 일반직 전환시험에도 관심이 생기고, 일을 계속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어. 예비 시어머니가 상당히 고집이 있으시고 많이 간섭을 하실 것 같거든.”


현서는 본인의 의견을 나름 피력했음에도 결국 시어머니가 정해준 예물 백을 갖게 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혼집의 인테리어에 깊이 관여하는 시어머니 때문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함께.


“왠지 내가 집에 있으면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논다고 생각하시면서 더 간섭하실 것 같단 말이야. 휘두르려 하실 것 같아. 결혼 전부터 계속 전화 오고 집 인테리어 할 때 자기 머물 방 만들어 놓으라 하시고, 시집살이 장난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남자 친구는 부모님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스타일인 것 같더라고. 눈치도 없고. 나도 매일 출근하고 돈도 벌면 쉽게 시집살이 못 시키시지 않을까?”


“아무래도 ‘내 일’이 있으면 간섭을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남편 돈으로 놀고먹는 게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 사실 살림을 한다는 게 놀고먹는 게 아닌데도 옛날 분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실 수 있지. 난 직업이라는 건 쉽게 그만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 힘들면 그만둘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난 너 계속 일 하는 데에 찬성.”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민경은 어렸을 적에 할머니의 시집살이로 힘들어했던 엄마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었다.


할머니 댁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았던 민경네 가족은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서 식사를 했다. 엄마는 초저녁에 민경과 민희를 챙겨 할머니 댁으로 가서 저녁을 준비했고, 민경 자매는 그동안 할아버지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빠가 퇴근 후 바로 오면 식사를 한 후, 후식으로 엄마가 깎아준 과일까지 먹고 엄마가 설거지를 마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보수적이었던 할머니는 여름에 엄마가 무릎을 덮는 짧지도 않은 반바지를 입으면 다리가 드러난다며 아주 못마땅해했고, 엄마가 만든 반찬의 간이 맞지 않는다며 갖다 버리라는 쓴소리도 했다. 딸만 둘 낳아 뭐에 쓰냐며 아들을 하나 더 낳으라는 이야기도 민경과 민희 앞에서 서슴없이 하곤 했다.


아빠는 할머니의 이런 행동을 알면서도 딱히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착한 성품의 여린 아빠는 평생을 부모님의 말씀대로 살아왔기에 감히 부모님께 대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끔 아빠가 어린 민희를 안고 갈 때면, 일 하느라 힘든데 아이까지 안아서야 되겠냐며 민희를 빼앗아 엄마의 품에 안겨주기도 했다-이랬던 할머니가 고모네 식구가 방문할 때 고모부가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짐가방을 들고 오면 사위가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 없다며 좋아했다. 옛날에는 효자 남편과 며느리를 괴롭히는 시부모, 그리고 괴로움을 삼키는 며느리가 당연한 듯 많았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어렴풋이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만 느꼈는데, 커서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대체 왜 그러셨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들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집에서 ‘놀고 먹어서’ 마음에 안 드셨던 걸까?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늘 정갈하고 깔끔했는데. 엄마는 나와 민희를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정성을 다해 키워주었는데. 요리학원을 다니며 익힌 솜씨로 아빠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춘 식사와 나와 민희를 위한 식사를 항상 따로 챙겨주었었는데-엄마의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엄마가 만들어준 요구르트와 스낵을 먹고, 같이 크로켓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는데. 생일 케이크도 직접 구워서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었던 엄마-어렸을 땐 그저 밖에서 파는 케이크가 최고인 줄 알고 불평을 했었는데 이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커서야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책꽂이는 온갖 육아와 교육과 관련된 책들로 가득했었다. 다양한 교구와 재료들로 민경과 민희의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해 모두가 잠든 밤이면 혼자 책을 보며 연구하고, 공부했던 엄마를 알고 있는데.

바쁜 아빠를 대신해 육아를 전담했던 엄마는 절대 ‘놀고, 먹지’ 않았는데.


어쩌면 엄마는 일을 그만두고 살림을 하게 된 것에 크게 후회를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힘들게 들어간 회사였을 텐데. 직장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다는 이유로 시시때때로 시어머니에게 불려 가고, 싫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지도.


본인의 아들이 사랑한 여자, 그리고 함께 가정을 꾸린 사람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아껴주고 존중해줄 수는 없었을까? 며느리라고 해서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데, 왜 그러셨을까? 외할머니는 늘 아빠를 더 챙겨주려고 하셨었는데.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예고 없이 방문하는 시부모, 정기적인 시부모와의 식사, 시어머니의 막말. 아빠는 엄마가 덜 힘들게끔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을까?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민경은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말 그대로 옛날 세대이기 때문에 요즘 세대의 시부모는 확실히 다르리라 생각했고,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고부갈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설마 진짜일까 싶었는데, 현서가 들려주는 실감 나는 이야기에 옛날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의 하소연과 남자 친구와의 다툼과 해결의 반복 끝에 현서는 몇 달 후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겨 곧 육아휴직을 들어갔다.


결혼이란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았다. 그냥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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