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풍경
스스로 밀고 들어가 끼워져 떠밀려 다니는 지하철 안은, 저마다 회사에 늦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발과 몸이 어슷한 상태로 파도를 타고 있다. 나도 그 틈에서 멀어진 손잡이를 잡고 버티고 있다.
우리 동네가 된 신당동. 오늘 난 지하철이 아닌 걸어서 명동에 있는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아침부터 바쁘게 걸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른둘, 도시의 로빈슨 크루소. 독신인 나, 혼자 걷는 길은 조금은 느려도 좋고 길을 잘못 들어도 괜찮다.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는 나는 그만큼 자유로웠다.
평소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간보다 나는 일찍 출발했다. 회사까지 가려면 어떤 느려지는 사건이 생길지 몰라 넉넉히 시간을 잡았다. 새로 이사 온 동네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만, 처음 가는 길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기에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난 옥탑방 계단을 내려왔다.
약수역 동호로 북쪽 방향 인도를 따라 낮은 오르막을 걸었다. 동호로 건너 빌딩 사무실 창에는 국회의원 이름이 크게 쓰여 있다. 잘 나가는 여성 국회의원이었지만 요즘은 통 보이지 않는다.
차들은 아침을 달리고 나는 걸어온 오르막길이 끝나자 다시 내리막이 시작된다. 둥그런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쓰인 장충체육관 글씨를 읽고 흠칫 놀란 눈으로 훑어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체육관, 장충체육관을 비켜 가며 생각보다 작다는 느낌과 여러 번 덧칠한 빛바랜 페인트 색을 보아 상당히 낡아 보였다. 내가 상상했던 장충체육관 하곤 달랐다. 오래전에 지어졌으니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실내 스포츠는 거의 다 여기에서 치러졌고 정치적으론 체육관 선거가 일어났던 곳으로 유명하다.
내 마음속, 문화유산 하나. 장충체육관이 기록되고 있을 때 신라호텔이 불쑥 들어왔다. 호텔 진입로에 한옥 지붕을 얹은 커다란 문과 안쪽으로 직사각형 호텔 꼭대기에 더 신라라는 글씨가 멀리서도 신라호텔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신라 호텔을 보는 내 눈은 반가움보다 도시의 세련된 화려함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저 큰 호텔을 난 아직 갈 일이 없지만, 신라호텔은 숙박과 식사비도 꽤 비쌀것임으로 유명 인사나 외국 사절들이 묵을 거라 생각했다.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강 건너 불야성을 보듯 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전철 안에서 듣기만 했지 내린 적이 없는 동국대 역이 있다. 옆으로는 작은 공원이 이어져 있다. ‘후아’ 출근길 예정에 없던 문화산책을 하고 있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개천 주변에 조성된 장충단 공원, 1900년 고종이 창설하여 충신들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장충단. 난 그 옆을 걷고 있다.
노랫말에도 나오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내가 사는 이웃 동네에 있다는 낯선 반가움이 중저음처럼 다가왔다.
건널목 경계선에 마주 선 사람들. 가라는 신호등 표시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직업, 다른 생각,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 가는 길도 다르다. 파란 불이 들어오자 일제히 다가와 사람들은 날 피해 멀어진다.
동국대 정문을 통과해 후문으로 나가면 좀 더 빠른 길이지만 초행길인 나는 쉬운 길 찾기. 직각으로 꺾고 꺾어 길을 걸었다, 나중에는 이 길로 가진 않았지만, 처음 길들인 습관을 버리기까지는 여러 번 이 길을 건너고 난 다음이었다.
엠버서더호텔이 보이고 호텔 주차장 입구에는 내가 항상 지나는 시간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호텔 직원 여성이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데, 나름 멋져 보였다. 품위도, 인상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호텔 좌측으로 난 골목을 내려가자 작은 인쇄소가 하나 둘 있고 적재된 인쇄물이 밖으로 나와 있다. 퇴계로에 접어들어 나는 충무로 방향으로 틀었다.
충무로역으로 가는 길옆에는 늘어선 애견 샾 윈도, 올망졸망 까맣게 눈뜬 강아지들을 보니 내 기분도 귀여워졌다. 창에는 두드리지 말라는 문구가 있다. 톡톡, 안녕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예쁜 강아지와 나는 보자마자 이별했다.
대한 극장.
“와 여기에 대한 극장이 있었구나” 놀란 눈으로 아래부터 올려다보았다. 영화 포스터가 크게 그려져 있고 매표소 앞에는, 아침부터 영화 보려는 예쁘게 차려입은 연인들의 화사한 얼굴이 보인다.
이래저래 바쁜 출근길에 내 눈과 가슴으로 들어오는 아침은 선명하게 보였다. 걷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 어떤 행복과 들뜸으로 내 맘은 설레었다.
사거리를 지날 때 아스팔트 바닥에 을지로 입구 방면이라는 화살표를 보고 나는 안도했다. 회사에 늦을까 걱정했지만 아직은 틀어지지 않고 잘 가고 있다.
“와아, 명동성당”
“진짠가” 하고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여기는 명동이고, 정말로 명동성당이라고 쓰여있다.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길 따라 내려가며 명동 성당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걸었다. 우주왕복선이 공중을 향해 서 있는 것 같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계신다는 명동 성당.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국 가톨릭의 성지 명동 성당을 회사 도착을 앞두고 나는 보고 말았다.
전동차 안에서 부대끼는 어제와는 정말 달랐다. 물론 걸어간다는 것이 가까워진 회사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늘 보았던 거리의 새록새록한 풍경들과 깨끗이 씻은 사람들의 밝은 얼굴도 보았다,
지하철 안으로 스스로 밀고 들어가 꽉 끼워진 채 출근전쟁의 파도를 타던 나. 오늘 아침 나는 걷는 재미에 빠졌다. 비만 안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