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기억은 즐거운 추억으로
20년 전 광주에서 친구와 같이 작은 사업을 했다. 그때 친구는 하루하루 번 돈을 들고 도박에 탕진했다. 도박판 주위를 맴도는 친구와 그 친구들은 노름에 빠져 징글징글하게 폐업하는 날까지 내속을 태웠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난 광주를 떠났다.
부고를 알리는 문자가 들어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고를 포함한 경조사가 잦다. 친했던 친구의 형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메시지였다.
나이가 많으실 텐데 하고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가을 추수를 도와주러 갔다가 친구 아버지께서 막걸리를 대접에 가득 따라주시던 기억이 몇 해 전 일처럼 선명하다.
친구 형이 전화가 왔다.
“아버지 완전히 가셨소?”
“그래” 쓸쓸히 웃으며 대답한다.
“그럼 형님은 이제 아버지도 없고 엄마도 없네?”
“바쁜데 못 오냐?”
“가야제”
내일 오후에 간다고 했다. 친구 형과 나는 간혹 근황을 알리는 통화는 했지만, 형의 동생인 친했던 친구는 그동안 연락하지도, 연락이 오지도 않았다.
광주를 떠나 서울을 여러차례 이사 다니면서 난 생존을 위해 일했다. 도시에선 일하지 않으면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으니 나는 쉼 없이 일했다. 20년이 지나 나는 어느 정도 정착했고 고등학교 친구였던 친구도 그 노름쟁이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 알아서 살고 있다.
다음날 용산발 광주행 ktx 열차를 탔다. 오후 5시쯤 나는 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를 보았다. 먼저 내가 말을 걸었다.
"아야 잘 있었냐"
"응 어서 와라." 하며 낮고 편안 목소리로 친구는 반가움을 표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영정에 절을 했다. 그리고 상주인 친구와 형에게도 명복의 절을 했다.
아버지는 예상했던 노환으로 인한 죽음이라 그런지 장례식 분위기는 그렇게 애달프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형님을 보고 반가웠지만 웃고 떠들 수는 없다. 비교적 조용한 장례식장안은 그냥 띄엄띄엄 들어오는 추모객을 친구와 형은 조문받고 안내하고 있다.
맥주를 3병째 마시고 있는 나.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의 근황과 그간 지낸 이야기를 하면서 오랫동안 보고 싶지 않았던 멀어진 거리감과 시간이 좁혀졌다.
1시간이 지났을까. 출입구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들어온다. 도박판을 전전하던 그 징글징글한 20년 전 악당들이 들어온다.
친구의 친구, 노름 멤버들. 갑자기 20년 전 사람들이 왕창 몰려 들어왔다. ‘씨브랄 새끼들’이라는 자막이 머릿속에 순간 쓰였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밉지 않았다. 반가웠다.
그렇게 말 안 듣던 노름쟁이들이 그 당시 나를 괴롭혔는데, 시간이 흘러 썩어 비료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다시 만나게 되어 즐겁고 반가웠다. 도박의 전쟁터에서 디지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이 악당들은 20년 동안 몸이 넓적해지고 얼굴이 동글해졌다. 속도 동글해졌는지 말과 행동이 부드럽다. 다들 결혼하고 애들도 있다고 한다. 얘기를 나눠보니 성실하게 산다. 놀때는 앞을 안보고 살더니 결혼하고 애 낳고 살더니 재테크의 일인자가 된것 같다. 도박경험이 재테크에 도움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건 아닌것 같다.
서른 살에 맘껏 놀고 50이 넘어 만나게 된 친구들. 친구 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우리들을 다시 이어 주었다. 중년이 된 친구들 다들 건강했으면 한다.
ktx 열차에 올랐다. 언제 볼지 모르는 아쉬움을 뒤로, 나는 떠났다. 내 삶이 있는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