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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으로 깎은 연필 Nov 20. 2023

바라볼 수밖에 없는 보호자

괴로운 차멀미

곁에 보호자가 있다는 건 마음이 한결 놓이는 든든한 존재다. 그렇지만 세상에 100% 보호란 없다. 보호자는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미성년자일 때 엄마가 보호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단지 엄마가 다 해줬기 때문에 당연한 줄 알았던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보호자'라는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울방학. 남쪽 끝 시골에 사는 나는 열다섯 중학생이다. 삼촌 결혼식이 멀리 서울에서 하기에 생애 최초 서울을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소풍을 한밤 한밤 세면서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느리게 가는 날짜와 밤이 오기를 잡아당겼다.


새벽 5시 마을 앞에 온 거대한 관광버스. 친척 내외와 부모님, 동네 어른들, 그리고 딸려 나온 애들은 다 깨지 못한 잠을 참으며 버스에 올랐다. 서울 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런 일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한껏 부푼 맘으로 난 차에 올랐다.     

버스를 탈 때만 해도 서울 간다고 즐거워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서울이 멀게만 느껴졌다. TV에서만 봤던 서울 구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려는지 방훼자 차멀미는 지독하게 나의 정신과 뱃속을 갈가리 주물러 반죽해 괴롭혔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억지 잠을 자며 행여 실눈을 떠봐도  밖은 아까 봤던 똑같은 도로 위다.

 같이 앉은 사촌 동생과 옆줄에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나 보다. 시끄럽게 떠들며 음료수 달라고 하는 소리도 여러 번 들렸지만, 좋아하는 음료수도 내 정신을 번쩍 뜨게 하지 못했다.

 고무 시트 냄새가 가득한, 쾌적하지 않은 버스 안 공기로 인해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렸다. 시골 버스보다 좋은 차였지만 앉아있는 나는 심하게 불편했다.

자다 깨다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나는 축 늘어져 서울의 호기심도 반가움도 다 귀찮았다. 일단 살고 보자고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삼촌의 결혼식은 시골 마을 결혼식과 달리 예식장에서 서양식으로 진행되었다. 비디오 촬영기사는 카메라에 밝은 등을 달고 천천히 지나가는데 눈이 부셨다. 내가 조카로 보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만만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촬영기사는 섬세하고 정밀하게 나를 찍는다. 어지럽고, 속도 안 좋은데 눈까지 멍하게 만들어 버려 만사가 귀찮아졌다.


삼촌 결혼식을 마치고 뷔페에서 식사했다. 여러 가지 음식들은 많은데 입맛이 없다. 처음 본 서울의 낯가림인지 나서서 내놓은 음식을 가지러 다니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은 기운도 좋다. 나는 힘이 없는데, 볼 때마다 친구들은 자리를 달리하고 있다.     

짧은 식사 시간이 끝나자 동네 어른은 길이 멀다고 버스에 타라고 한다. 집에 간다는 말에 반갑긴 했지만, 한편으론, 서울에 오자마자 되돌아간다는 마음에 뭔지 모를 아쉬움이 뒤죽박죽 된 채 버스에 올랐다.

 뒤쪽의 의자를 본 나는 비좁은 감방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와마아 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버스. 나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오전에 그랬던 것처럼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앞 좌석에 앉은 내 동생도 차멀미를 심하게 하고 있다. 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힘없는 동생의 머리는 원심력에 따라 극좌와 극우를 넘나 든다.

나는, 내가 더 많이 힘들어 어떠한 동정의 감정도 생각할 수 없다. 눈꺼풀 들 힘도 부족한데 누구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정답인데 탈출할 수도 없고, 탈출한다 해도 갈 곳이 없으니 차가 도착하는 집까지 버틸 수밖에 없다. 그냥 참을 수밖에 없다. 꼼짝 못 한다는 말이 이런 걸까. 좁은 의자에서 차멀미와 내 인내심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얼마나 갔을까. 반쯤 감은 눈으로 차창을 바라보다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뒷좌석에 있는 엄마 목소리다.     

“허허 이! 노므 집 새끼들은 암스랑도 안은디, 우리 집 새끼들만 디질라고 하네. 허허”

오래전 일이다.     


지난달 시골에 다녀왔다. 

무릎이 좋지 않은 엄마는 계단을 내려갈 때 한발 한발 내리고 걷는다.

난 말했다.

“남의 집 엄마들은 잘도 걷드만, 우리 엄마만 못 걷네 허허”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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