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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으로 깎은 연필 Mar 23. 2024

마녀가 말한 부츠

한 남자의 상상 

 내 의지와 상관없이 50% 확률로 나는 남성으로 정해져 수십 년째 혼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여성이 부럽다고 느낀 적은 없다. 흔하지 않은 세련된 여성의 아름다움에 본능적으로 눈이 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다. 굶주린 늑대에게 다가온 그녀의 유혹은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망상의 초기증세일까?


  의사의 진료를 마치고 물리치료실로 안내되었다. 스물다섯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신입 여성 물리치료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복 하곤 다른 유니폼은 물리치료사의 몸매가 드러나 보여 날씬해 보였다. 꽤 세련되어 보이는 젊은 물리치료사. 내면의 나는 여성이라고 교감신경이 긴장하고 겉면의 나는 침착을 유지하며 물리치료사가 하라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오십견은 치료기간이 오래 걸리는 재활치료다. 직장과 가까운 정형외과 물리치료실을 주 삼일은 꼭 다녔다.

 의사 선생님의 진료 후 물리치료실에 가는 게 순서지만, 실상 의사 선생님에게 인사하듯 서로 말을 건네고 답하고 끝난다.

“어깨는 괜찮아졌어요?”

“네, 조금요”

둥그런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일어선다. 그런데 싫지 않다. 짧은 점심시간을 내어 병원에 오는 나는,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불만이 생길 리 없다. 어차피 물리치료가 전부이기에 원칙상 이뤄지는 의사 선생님의 면담 시간도 사실은 아까울 지경이었다.     

물리치료실을 갈 때마다 어제의 여성 물리치료사가 왔다. 많은 물리치료사 중에 우연히 또 올 수 있나라고 생각이 스쳤지만 젊고 예쁜 물리치료사라서 싫지는 않았다.     


 물리치료사는 병원의 직원이 아니라 상근 하는 개인사업자다. 그렇지 않은 큰 병원도 있다지만 대부분 이렇게 한번 정해지면 치료가 끝날 때까지 운영된다고 물리치료사가 말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세요?” 

초음파치료를 마치며 물리치료사가 묻는다. 갑자기 묻는 말에, 난 생각난 대로 말했다.

“작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어요”

“와, 그럼 돈도 많이 벌겠네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어깨가 많이 아프시죠?”

“네”

물리치료사는 내가 올 때마다 반가워하며 어깨가 차츰 좋아지냐며 뻔한 질문을 곱게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무뚝뚝하게 “네”라고 답만 했다.     

두 달이 넘게 다니는 물리치료실. 병원 사람들을 거진 다 알 정도가 되었다. 수납창구의 두 명의 직원. 주사기 쟁반을 들고 다니는 간호사, 여러 명의 남녀 물리치료사도 이젠 눈에 익다.

그중에 내 담당 물리치료사가 제일 예쁘다. 속마음은 어쩐지 모르지만. 도시의 화려함 속에서 사는 세련되고 매력 있는 여성으로 보였다.     


자주 가는 병원 물리치료실을 두고 회사 동료는 물리치료사가 예쁘다던데 잘해보라는 둥 싱거운 농담을 하며 시시덕거리며 웃곤 한다. 남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나 경제인데, 혼자인 남자들은 이성 이야기를 더 재미있어한다. 그중 나도 호기심이 많은 남자 중 하나다.

     

 물리치료사와 많은 이야기는 하진 않지만 가끔 치료적 대화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뉴스 기사거리에 짧게 웃곤 했다. 

“선생님 신발 좋아하세요?” 물리치료사가 밝은 표정으로 묻는다.

“신발? 무슨 신발요?”

“저는 요즘 부츠 보고 있어요”

“부츠? 부츠는 일반 신발보다 비싸지 않나요?”

“네, 한 70만 원 해요”

“와! 그렇게 비싸요?”

“네, 남들 다 그렇게 신어요”

“아, 그렇군요” 

고개를 들어 물리치료사를 힐긋 보았다. 순간 마녀에게 속으면 안 된다는 반사적 직감이 차갑게 등짝을 훑었다. 

‘무슨 뜻일까? 다들 그렇게 신는다니, 내 주위 동료 여성들은 그렇지 않던데.’

‘하아’     


‘착각은 자유’ 

부츠를 사달란 말처럼 들렸다. 뭘 믿고 베팅하는 걸까? 내가 사줄 것 같아서? 그냥 어린 여자로 예쁘게, 때론 매력적인 여자로 여겼는데, 거참 난감하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밉지는 않은데, 만약에 사준다면 만나줄 수 있다는 나의 과대망상까지 끌어다 해석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감가상각을 해 볼까?

15년의 나이차! 

일단 나는 최상급 단골이라는 것은 병원 사람들 다 알 테지? 그리고 이 정도 단골한테는 뭔가 사은품이라도 줘야 할판아닌가? 

보험가입도, 인터넷 가입도 사은품이 굉장하던데. 여긴 이런 것도 없잖아. 병원도 서비스업인데 말이지. 그리고 물리치료사인 너는 사후관리도 하지 않잖아? 



사흘이 멀다고 다니는 물리치료실을 여러 달 다니다 보니 내 담당 물리치료사가 비번일 때도 몇 번 있었다. 그런 날은 다른 물리치료사가 와서 나를 치료했다. 

‘와’ 

확실히 다르다. 같은 여성 물리치료사인데도, 전문가란 이런 것일까. 운동법과 견인법, 수기까지 완벽하게 달랐다.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높은 치료를 해주고 갔다. 내 담당 예쁜 물리치료사와는 급이 달랐다. 아팠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만족했다. 가고 나면 어깨가 한결 나아질정도로 시원했다.     

 랭크를 붙이자면 S급 물리치료사다. 내 전담 물리치료사는 학과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미안하지만 성장가능성과 예쁜 것을 포함하고도 잘 쳐줘야 갓 입문한 초급물리치료사다.     

물리치료사를 바꾸어 달라고 말할까 생각도 처음엔 했었지만, 장점이라곤 젊고 예쁜 거 빼면 공갈빵인데, 번거로움이 싫어 그대로 유지했었다.      

‘단골을 뺏긴다는 건 어마어마한 매출이 준다는 것인데, 아마 70만 원 하는 부츠보다는 훨씬 더 이익 아닐까? 내가 물리치료사를 바꿔달라는 말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성장 중인 마녀가 초보 마법 스킬 하나를 내게 사용해본건  아닐까?’ 

“남들 다 그렇게 신어요” 너의 능력을 시험하겠어!   귓가에 들리 듯 전해지는 마법스킬.   


. 내가 병원에 온 이유는 치료받기 위해 왔는데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환자가 치료에 전념해야지 무슨 연애할 생각을 한다니 떡줄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것일까? 

아니야 그 여자는 남자의 능력을 보는 거야 그중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느냐를 시험해 보는 것 일수도 있어. 여자의 본능 이잖아. 밑져야 본전이지.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렇지만, 70만 원 하는 부츠는 아니지 난, 10만 원짜리 신발 신는데. 미쳤지 무시하자. 호구되면 두고두고 아작 날 수 있어.   


물리치료사는 부츠를 사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솥뚜껑 보고 놀라 자빠진 얼간이처럼 나만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좋아했다가, 내 함정에 빠져 어떤 실체도 없는 머릿속 일들을 사실인 것처럼 그녀를 마녀로 만들고, 난 피식 웃었다.

 뭐 하나 빼먹고 나온 외출처럼 허전했지만, 꼭 집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쉬움은 곧 작별이 올 거라고, 시간은 기다림 없이 훅 가버렸다.


 봄이 올 무렵 어깨가 다 나아가고 병원에 가는 횟수가 줄었다. 스스로 여기서 끝 내야지 하면서 병원에 다신, 오지 않을 거라고 물리치료사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남자에게 찾아온 상상과 착각의 기억,  과대망상 초기 증세는 아니었겠지.

 "그때 물리치료사는 정말 예쁘긴 했지 마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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