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배식줄은 멈추고
하얀 블라우스에 깍두기 국물이 묻었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요? 당신의 실수가 아닌 남의 실수로 그랬다면요? 한 남자의 조급함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블라우스의 주인도, 실수한 사람도, 그 순간 극과 극의 공포에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을 맞은 15층 식당 앞, 3대의 30인승 엘리베이터에서 직원들이 쏟아져 나와 줄을 선다. 앞은 점심을 같이할 내 동료, 뒤에는 흰 블라우스를 입은 40대 여성이 붙어 오고 있다.
영양사의 밝은 인사를 맞으며 식권 카드를 찍고 배식대로 갔다. 맛있는 점심 생각에 팔은 싸게 움직이고 앞사람과의 발 간격은 빈틈이 없다. 한눈으로는 어디에 앉을지 자리도 찾고 있는 나.
긴 배식 줄 사이에 앞이 여자면 어떻고 뒤가 남자면 어쩌랴, 항상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이렇게 줄 서 밥을 먹는다. 백화점 근무는, 밝은 미소와 깔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고운 말로 고객에게 싫어도 좋은 척 말해야 한다. 이처럼 직원들은 작은 공간에 서 있다, 자유처럼 다가오는 점심시간을 모두들 기다린다.
배식대에 접어들어 자율배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밥을 한 주걱 담아내자, 내 눈에 들어온 맛있어 보이는 깍두기가 있다. 깍두기가 재난급 정신 마비를 시킬지 모르면서, 쇠집게로 깍두기를 하나둘 빠르게 식판에 담았다. 즐거운 점심시간이 순조롭게 시작되고, 사람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아, 빠르게 집어가는 쇠집게가 너무 빨랐나! 빨리 담고 앞으로 가려다 깍두기 하나를 놓쳤다.
‘허걱’ 내 뒤 흰 블라우스가 깍두기를 집어 오는 소맷자락에 깍두기를 떨어뜨렸다.
깍두기가 떨어짐과 동시에, 흰 블라우스는
“꺄악” 칼에 베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윽, 아차' 큰일이 일어났다. 수습할 수 있을까? 측정 못할 비상사태가 무섭게 다가왔다.
짧지만 큰 비명은, 배식 줄의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즐거운 시간은 고요로 바뀌고, 식사를 하던 모든 직원의 눈을 소리 나는 배식대로 전부 불러냈다.
흰 블라우스의 표정은 그랬다. 블라우스 인생 최초, 최고 단계로 올라간 화딱지. 그 화를 억지로 누르며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 내가 악당처럼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흰 블라우스는 피해자이기도 하고, 창피함도 덮어썼다. 옷도 더럽혀져, 이 옷입고 일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사건의 구경꺼리가 된 여주인공으로도 만들었다.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내 몸의 긍정 호르몬은 말라버리고, 교감신경은 비틀거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내 실수다. 나로 인해 발생했고 책임은 내게 있다. 뭐라고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왜? 이런! 미친, 죽으려고 환장했어? 이런 망할 새끼!’
흰 블라우스의 표정과 눈은 오만가지의 상급 욕이 함축되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하얗게 질려 어떤 욕을 해도 분이 안 풀릴 기세다.
하루 이용자만 수 천명되는, 서울 소공동 백화점 직원식당.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되었지만, 그보다 흰 블라우스의 무시무시한 분노의 눈빛은 내가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이글거렸다.
고급 여성복 매장에서 근무하는 매니저 같은데, 깍두기 국물을 묻히다니, 휜 블라우스에게 막대한 미안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백화점 매니저급 언니들은 히스테리도 상당하다던데, 나 오늘 잘못 걸렸다. 뼈하나 분질러 드려야 분이 풀릴는지 정말 심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빠른 사과다. 깍두기를 집을 때, 뒷사람이 가까이 있어 안전하게 집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사과로 통할 것 같지 않다. 나로 인해 발생한 손해이기에 당연히 사과해야지. 철벽인 줄 알지만 일단 두드리자.
첫 번째 단어가 생각났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도 숙이고, 허리도 굽히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블라우스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쌍욕이 나올 것 같았고, 나를 보는 경멸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뭐라도 해야지 하면서도 달리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차라리 욕이라도 했으면, 어떻게 풀어 갈 텐데, 답 못 찾는 날, 아직도 뚫어져라 보고 있다.
흰 블라우스는 사과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흰 블라우스는 요즘 흔히 말하는 멘붕이 온 것이다. 솔직히 나도 입장은 다르지만 멘붕 상태다.
흰 블라우스는 아름답게 무장하고 나온 사냥터에, 전혀 예상 못한 깍두기 하나에 진흙 구덩이에 미끄러져 오늘 하루를 망쳐 부아가 치민다고, 가해자인 날 잡아먹을 듯 그대로 서있다.
안 되는 줄 알지만, 급하게 식탁에 달려가 냅킨을 뜯어다, 닦아보라는 시늉을 했다.
흰 블라우스는 처음으로 말했다.
“이걸로 되겠어?”
화가 잔뜩 섞인 목소리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후하, 진땀이 나고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와마,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세탁비 준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걸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만약 그 말을 했다간, 세차게 뺨 맞을 것 같았다. 단지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거듭 허리를 숙였다.
흰 블라우스는 더운 나라 들소. 나는 얼어붙은, 철없는 작은 임팔라. 여기서 내가 조금만 더 잘못한다면 받아 버린다는 분노의 눈빛이었다.
배고픈 마음에 좋은 자리에 가서 빨리 먹으려고 했던 나, 깍두기 하나에 산재급 사태가 벌어졌다. 유난히 희고 밝은 블라우스, 비싼 명품옷인가? 그래 보였다. 아끼던 걸 오늘 입었는지 알 수 없다. 깨끗한 이미지로 고객 응대해야 하는데, 깍두기 국물이라니. 나라도 머리가 돌 정도로 화가 날 것이다.
들판에 단둘이 있었다면 나는 뿔에 받혀 멀리멀리 날아가 뻗어 버렸을지 모른다. 다행이다. 의도치 않은 실수에 이리 당황스럽다니, 직원식당에 관중이 많았다. 실수로 인해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폭력은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잘 지켜지는지,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기에 나는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뒤늦게 아주 늦게 영양사가 달려오고 몇몇 직원이 와서 식판을 거들고 자리에 갖다주고 나서야 숨 쉴 수 있었다. 배식 줄이 움직였다. 자리에 앉은 흰 블라우스에게 한 번 더 허리 숙여 죄송하다고 말하고 사고는 종료되었지만, 이 사건은 수백 명 이상 관람했고 입소문이 났다.
다음날 직원식당 배식대 깍두기 칸에는 쇠집게가 아닌 커다란 서빙 스푼이 놓여 있었다.
10년도 훨씬 넘게, 훌쩍 지난 지금 거리를 걷고 있는 나. 오월의 아침, 어떤 하얀 블라우스가 지나간다. 순수하고 아름답다.
‘풉’ 좋은데, 흰 블라우스는 조심해야겠다. 멀리 건널목의 파란불이 들어온다. 뛰지 않을 거다. 빨리 가지 않을 거다. 빠르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다 큰일 난다. 흰 블라우스에게 미안함을, 천천히 가는 질서로 조금이라도 갚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