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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으로 깎은 연필 Jun 14. 2024

초보 러너의 입문기

러닝을 할수록 즐겁다

오늘 낮 티라노사우루스 새끼를 잡다가 어미한테 들켜 도망갈 때 난 이 세계 마지막 각오로 달렸다. 내 키만 한 관목림을 뛰어넘고 길 없는 풀숲을 탱크처럼 밀고 나갔다. 

나와 내 가족 우리 부족을 위해서 사생의 초특급 레이드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앞에 미움도, 욕심도 쓸데없는 생각도 다 필요 없었다. 

 6천500만 년이 지난 나는, 사라졌다. 나의 세포를 이어 진화해 가는 후인들이여, 나는 잊혔고 멀어졌다. 당신은 내 삶을 체감 못 할 테지만, 내 삶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이것 하나만 각인하겠다. 질주. 질주로 한계를 경험하라. 질주 안에서 기쁨을 찾아내라. 당신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다. 네 안의 너를 깨워라.


흑석초등학교 아래 한강길을 따라 동작역을 지나 반포천으로 달렸다. 이어진 피천득 산책로를 따라 끝자락에 이르면 서울 성모병원 사거리가 나온다. 유턴했다. 이때부터 러닝이 아닌 속도를 끌어올린 질주를 시작하고, 질주의 종착지 반포 종합운동장이 나오면 5km 러닝이 끝난다.     

점점 무거워지는 내 몸과 마음. 항상 날 따라다니던 게으름뱅이의 유혹에 이렇게 저렇게 하루를 남 따라가듯 열심히 일했어도 진정 백퍼센트 행복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내 몸도 변하고 있다. 서른까지 만해도 먹어도 먹어도 찌지 않던 63kg의 가뿟했던 몸이 담배를 끊고 나서 5kg이 더해졌다. 입맛이 좋아져 군것질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마흔이 되었을 때는 3kg이 추가되었다. 

 70kg 초반으로 조절되던 몸무게가 사이클을 타는 횟수가 줄어들고 운동량도 부족하자 체중이 늘었다. 작년부터 동호인 사이클 선수도 그만 두어 칼로리 소모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지난겨울을 지나면서 몸무게가 77kg을 넘었다. 내 인생 최대의 몸무게에 놀라고 거울에 비친 뱃살에 착잡해졌다.      

결심했다. 몸무게를 줄여야겠다고, 5km 달리기를 했다. 처음 한 달리기는 5km 35분 3초 걸렸다. 평균페이스 6분 20초가 나왔다. 

“후 하 후 하” 바닥에 눕고 싶었을 정도로 서 있기 싫었다. 터벅터벅 걷다 빈 벤치가 보이자 벤치에 누워버렸다.


 인내의 고통 후 휴식은 편했다.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 이 순간만은.

그런데 말이다. 달리니까 좋다. 수 천만년을 죽고 태어나 이어진 인간의 본능은 괴수로부터 살기 위한 질주 본능을 깨웠다. 질주가 끝나면 살았다는 착각인지 모르지만, 기분이 좋았다. 날 괴롭혔던 내 안의 잔소리 마왕과 마녀의 유혹도 나가떨어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힘들었던 러닝 시간이 아까워 먹는 것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맨날 배고프다는 뱃속을 횡격막이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식욕도 사라지고 위장도 움츠려져 작아진 느낌이다.          

이틀 뒤 달렸다. 이번엔 29분 20초 걸렸다. 달리고 나면 개운하고 향상되는 시간 단축에 흡족했다. 

2.3일에 한 번씩 꼭 달렸다. 점점 들어오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보름이 지날 때쯤 28분 10초에 골인했다.  이대로 몇 년이 지나면 꽤 잘 달리는 선수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만화 같은 생각이지만 내가 수천 년을 산다면, ‘우와’ 슈퍼맨도 가능하리라.     


계속되는 달리기에 오늘도 준비운동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운이 넘친다. 그런데 막상 달리기 시작하고 10분이 넘어갈 땐, 나와 내 안의 악당과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아휴! 힘들어, 그만 뛰고 싶다, 지루해, 재미없어, 왜 이리 먼 거야, 너무 더워, 걷고 싶다, 온갖 부정적 생각들이 나를 잡아당긴다. 

나는 안다. 뛰고 난 후의 기쁨을, 게으르고 나쁜 생각들을 모조리 무시, 무시, 무시하다 보면 어느새 호흡과 몸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이때부터 조금 지루하지만 참을 만하고 악당은 말이 없다.     


6천5백만 년 전 나의 조상님은 티라노사우루스 새끼 잡다가 달려오는 티라노사우루스 어미를 피하려 죽을힘을 다해 달렸었는데, 오늘 나의 이런 생각들은, 보잘것 없는 나태 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멀리 보이는 길은 흔들리며 점점 가까워지고 주변의 난간과 연석들은 나를 빠르게 비켜 간다. 생각해 보면 빠르게 지난 길인데 뛰면서 보는 길은 힘들고 멀기만 하다.     

사람 마음이 이리도 게으르고 간사하다니 알면서도 조금만 힘들면 편한 걸 찾는 나는, 청개구리 유전자를 받았나? 아니야 나는 그 옛날 티라노를 잡던 용맹스러운 인간의 유전자를 받았단 말이야!

“집중하자. 이제부터 지독하게 행복한 질주가 시작되니까.”     


내가 내 안의 유혹에 휘둘리고 먹을 것 다 먹고 다녔다. 동네마다 널려 있는 편의점. 난 편의점 빵을 즐겨 먹었다. 특히 보름달을 좋아했다. 몸매가 풍선이 되든 말든 먹고 난 후에 항상 많이 먹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내가 네 말 듣다가, 잘 될 일도 망치고 손해 난 게 많기에, 나는 계속 달려야겠다. 질주가 끝나면 내가 단단하게 성장하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나 만큼 컸던 게으른 너의 자리가 좁아지는 재미에 내 하루가 즐겁다.

 바로 누운 자세에서 자다, 배를 만지면 배가 훅 꺼져있다. 행복하다. 1km 페이스 5분 10초대로 진입하고 체중은 72.2kg로 내려왔다. 조금만 더 힘내자. 영원한 숫자, 체중 6번대를 향해.

며칠 후 있을 10km 마라톤 대회에 자신 있게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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