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 중요한 이유
야근을 마치고 마라톤 대회가 있는 여의도로 출발했다. 잠 한숨 못 잔 게 걸리긴 했지만, 마음은 자신감에 넘쳤다. 오늘 기온이 31도까지 오른다는데 잘할 수 있을까? 걱정과 설렘이 섞여 이래저래 초보러너의 기분은 한껏 밀어 올려졌다. 여의도 문화마당 가장자리를 빙 둘러친 수많은 천막들. 행사장은 축구장만큼 컸다.
맨 앞 천막에서 배번을 받고, 맨 끝 탈의장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기록 칩이라고 하길래 플라스틱 칩만 찾다가, 허탈하게 찾아냈다. 기념품 티셔츠 비닐봉지를 탈탈 털어도 없어, 당황했는데 종이띠 칩이 기념품 티셔츠 상표랑 엉겨 있었다,
오늘 열리는 마라톤은 제1회 긍정의 힘이라는 주제로 풀코스를 뺀 20km, 10kn, 5km가 진행된다.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다. 나처럼 50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모자와 마스크를 써 잘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2.30대가 많았다. 마라톤에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생각만으로 2.30대가 적을 거라고 당연시했던 내가, 생각이 짧았다고 인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몸매 좋은 사람들의 대 모임 같았다. 배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나도 그들과 같은 그룹에 일원이 된 것처럼 배를 넣어 힘을 주고 다녔다. 멋있게 운동복을 차려입은 미남미녀들 형형색색의 동호인단체와 같이 온 가족들 속에 나만 혼자 평범하게 다니는 것이 쪼금 외로웠다.
우리 아가씨랑 같이 왔으면 했지만, 달리기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우리 아가씨가 오지 않은 게 여러모로 잘 된 일이다. 만약 같이 왔다면, 이 더위에 5분도 못 뛰고 쓰러져 대 마녀의 저주가 폭발하면 감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나는 혼자가 엄청나게 편하다. 같이 갔다가, 이거 거저 고르다 결정장애에 시간 낭비하고 뭐라도 잘못 가거나 틀리면 범죄자 대우를 받을 때면 멘털이 강제로 붕괴되기도 한다. 오늘은 내 인생 첫 마라톤 출전 하는 날이다. 이까짓 외로움은 새발에 피다.
오전 9시 정각. 하프 코스 엘리트급이 출발하고 3분 후, 하프 중위권, 하위권이 출발했다.
그리고 10km 주자 상위권 40. 50분대가 그 뒤로 60분대 그룹이, 그다음 하위권 이어서 5km 그룹이 출발을 기다렸다.
10km, 50분대 그룹으로 갈까 하다 60분대에 섰다. 사람도 많기도 하였지만, 달리면서 천천히 앞지르자며 순서에 개의치 않고 60분대에 섰다. 나의 5km 기록으로 보면 50분 안쪽도 노려볼 만했다. 다만 연속 5km를 더 뛴다는 부담이 있지만, 오늘 첫 대회 기분 업 되고 기운이 확장되면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이랏 차차차”
어차피 기록 칩은 게이트를 통과해야 기록되므로 눈에 보이는 순위는 진짜가 아닐 수 있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 차례, 10킬로 60분 컷이 출발했다. 천천히 움직인다. 사람들이 밀착되어 있어 종종걸음으로 시작하여 달려 나갔다.
여의도 한강 둔치로 나와 자전거길과 인도를 따라 본격 러닝이 시작되었다. 길이 좁아 앞뒤 주자 들은 꽉 찬 종대로 뛰었다. 어느 정도 달리면 띄엄띄엄 멀어져 흩어질 줄 알았는데, 반환점까지 가서도 처음 같이한 앞사람과 옆 사람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60분대 그룹에 선 50분대 주자들처럼 처음 그대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이 사람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 60분대 그룹에 선 사람들 같았다.
7km가 넘어가자 사람들은 조금 흐트러지고 한 사람씩 질러 나가고 뒤로 빠지고 있다.
젊은이들 틈에 나는 속이 말이 아니다. 덥기도 하거니와 마라톤 전용 러닝화가 아닌 무늬만 러닝화라서 발바닥과 발등이 후끈후끈했다.
5킬로까지는 그런대로 페이스를 유지하며 사람들 틈에서 건재하게 달렸다. 반환점 돌아 8km쯤 되었을까?,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부족한 숨은 채우기 바쁘고, 땀에 젖은 헤어밴드는 채 흡수 못 한 땀이 눈에 들어가 쓰렸다. 도로를 달리는 다리는, 적색 점멸등을 의식했다.
더위에 강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평소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여름더위. 땀이 날수록 근육이 이완되어 더 컨디션이 좋아지는 나인데 내부에서부터 달아올라간 체열은 현재의 땀으로 식혀지지 않는다.
‘그래!, 한여름 옥탑방에서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신당동에서 살았었잖아! 이 정도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를 다독이지만 몸에선 제어할 수 없는 열이 나고 머리도, 다리도 무겁다.
잠을 못 잔 탓일까? 속으로 변명하듯 투덜거리다 언뜻, 남자들 틈에 껴있는 작은 여자. 날렵하지 않은 어린 아가씨. 키 큰 남자들 틈에서 잘 달린다. 처음부터 내 앞 옆에서 뛰기 시작했는데. 지치지도 않은가 보다.
처음 속도 그대로 달리는 작은 체구의 아가씨는 존중해주고 싶을 정도로 잘 뛴다. 멋지다고 할까? 열심히 연습한 결과이겠지, 지친 기색 없이 뒤처질 수 없다는 보폭이 당당하고 변함이 없다.
한 달 넘게 열심히 연습도 하고 체중도 줄이고 나름 민첩하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보통 일이 아니다. 지쳐가는 나를 보며 심각함의 물항아리가 넘실거린다.
더위도 한몫하지만 단순히 더위 때문은 아니다. 어젯밤부터 일한 나는 체력이 고갈되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참고 갔는데, 저기 보였던 코너길은 막상 가보면 끝이 아니다.
“흡흡흡 후후후, 후으흡 후우우”
세 번씩 끊어서 들이마시고, 내뱉고, 모자라는 숨을 크게 쉬어 뱉기를 반복하고 있다.
신발 안은 뜨거운 물속 같고 심장과 폐는 과부하가 걸린 최초의 증기 기관차 같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훌륭한 말도 살아있을 때 얘기다.
‘완마 안 되겠다.’ 속도를 급 제동했다. 걸었다. 뛰다 걷는 사람도 하나씩 보였기에 동료처럼 위안 삼아 걸었다.
아까웠다. 연습했던 시간보다 더 기록을 세우고 싶었는데, 작은 죄책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날 앞질러갔다. 뭔지 모를 아까운 시간들이 허탈하게 지나갔다. 호흡이 안정되었다. 3.4분 걸었을까 뛰어야 한다고, 멈추면 안 된다고 다리를 들었다.
무거운 다리를 들어 뛰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사람들과 발을 맞췄다. 뒤처지지 않으려 열심히 달렸다. 여의도 문화공원 도착지로 가는 통로, 토끼굴이 보였다. 끝이라는 반가움보다 참, 멀리도 있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남은 거리 500여 미터, 출발할 땐 내리막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생각지 못한 오르막이라, 내 지친 체력을 배로 뺏어갔다. 토끼굴을 나와 피니시라인까지 가는데 기록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같이 뛴 사람들과 잘 달리고 싶었고, 오늘 마라톤이란 거대한 숙제를 마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고되지만, 즐거웠다.
100여 미터 거리, 스퍼트.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오늘 마지막이란 질주 비록 속도는 약하지만, 몸과 마음이 하나 된 상태로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달렸다.
통과했다. 끝났다. 물에 담그지 않았는데도 몸에 붙은 티셔츠, 정신은 후련했다. 한 무더기 방학 숙제를 마친 것처럼 시원했다.
술 취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걸었다. 물부터 찾아 마시고 그늘진 화단 연석에 걸터앉았다.
땅바닥에 눕고 싶었지만, 눕지 못했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면 방바닥이라고 누웠을 거다.
철저한 체력관리 자체가 마라톤이다. 마라톤 한 달 연습 후에 달랑 뛴 나, 나는 꿈만 많은 하룻강아지였다.
다음번엔 잠 잘 자고 뛰어야겠다. 마라톤은 충분한 휴식 후 달리는 거지! 사는 것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