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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성 Dec 12. 2022

고딕 성당을, 순례하다-6:
누아용대성당

 

하늘의 빛을 담다: 누아용대성당


중세 도시, 누아용

     누아용은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100 킬로 미터 정도 떨어진 소도시다. 파리 북쪽 A1 고속도로 한시간 남짓 운전에 시골길로 들어서면  평화로운 밀밭 평원이 펼쳐진다. 밀밭 사잇길 따라 30 분 정도 운전해 누아용에 가까이 가면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이였던 아그리파가 닦았다는 곧은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잠시 가면, 멀리 우뚝 솟은 누아용 성당 종탑이 보인다. 종탑을 따라 곧장 시내로 들어가면 시내 중심인 작은 분수대 광장이 나오고, 광장 옆 나지막한 구릉에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누아용은 주민이 만명 조금 넘는 시골 타운이지만, 중세에는 영국 해협에서 부르고뉴 지역을 잇는 길목에 위치해 교역 요충지로 번창했다. 8 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세운 샤를마뉴 대제와 10 세기 말 프랑스 카페 왕조를 세운 위그 카페가 대관식을 올린 역사적인 도시다. 5 세기부터 성당이 있었는데, 1131 년 성당이 전소돼 1145년 고딕 성당이 시공해, 100 여년 후 성당이 완공됐다. 이후 14 세기에서 16 세기 걸쳐 성당 주위에 주교관, 사제관, 수도원 클로이스터,  도서관, 법정, 감옥, 자료실 등의 복합건물들을 하나하나 지어 마침내 성당 복합 구역이 완성 됐다. 그리고 성당 복합 구역을 둘러싸며 성채 안팎으로 도시가 자리잡았다. 누아용은 드물게 중세 도시 구조가 온전히 보존된 타운이라서 프랑스 주요 문화유적지다. 


 

성당 중심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중세 마을 중심

장엄한 서쪽 파사드

    광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성당 후진을 만난다. 성당 후진을 끼고 성당 건물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나온 성당 부속 건축물인 복합 건물 콤플렉스가 눈에 들어온다. 이 콤플렉스는 가운데 정원을 둘러싸며 법정, 감옥, 성당 귀중품을 보관했던 보물실, 성당 도서관들이 있고, 성당과 맞붙어있다. 특히, 도서관은 15 세기 프랑스 목조 건물을 연구하는 데 중요 문화유산이며, 지금도 그 시대 문헌들을 보관하고 있다. 


성당 후진 쪽에서 본 전경. 성당 오른쪽 정원을 둘러싸며 있는 건물들이 성당 콤플렉스다 . 윗쪽, 서쪽 파사드 광장을 둥글게 둘러싼 참사회 건물들이 보인다.


누아용대성당 도서관


    이 건물 콤플렉스를 끼고 성당의 부속 수도원 담장으로 따라 걸어 내려가면 널찍한 성당 서쪽 파사드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서 성당을 마주보며 로마 성채를 따라 수사, 신부, 교단 회원들이 거주한 참사회 건물들이 광장을 빙 둘러싸고 있다. 서쪽 파사드 광장 오른쪽으로 성당을 따라가면 주교관 구역을 만난다. 주교관 구역은 주교실, 주교 기도실, 정원, 주교관 타워, 주교 도서관 등, 많은 건물들이 모여 컴플렉스를 이루며17 세기까지도 확장해 왔지만 프랑스 대혁명때 거의 파괴되고 지금은 주교 도서관 건물만 남아있다.


    성당 서쪽 파사드는 장엄하다. 높이 솟은 두개 종탑 위용이 순례자를 압도한다. 종탑이 서쪽 파사드의 일부가 아니고, 서쪽 파사드가 두 종탑의 부분 같다. 두개 탑 사이에 건물을 지어 넣어 파사드 전체 구조는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파사드의 육중한 무게감이 중후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13 세기 후반 큰 화재로 서쪽 파사드가 약해져 3 개 정문이 있는 파사드 입구를 덮는 성냥갑 같은 입방체 모양의 큰 현관을 짓고, 현관 앞으로 돌출한 버팀벽을 세웠다. 


장엉한 성당 서쪽 파사드 

이 현관은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공간이다. 6 년 전, 8 월 비바람 내리치는 늦은 오후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현관 모서리 작은 테이블 위에 자비의 희년을 선언하는 안내 팜플렛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팜플렛 표지에는 자비의 희년 모토인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유로이 (루카 6,36)’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히 고개 드니 바로 머리 위에 내 키 3배 정도의 높은 검은 십자가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장대한 십자가를 마주치니 섬찟, 무서울 것 같은데 오히려 따뜻했다. 비바람 멎고 날이 개였다. 

성당 현관 모서리에 있는 십자가

공간에 하늘나라의 신비감을 담다

    성당 안에 들어서서 저 내진 쪽을 바라보면 “아! 이게 고딕 이구나.”하는 탄성이 나온다. 여기서 처음, 이전에 지은 고딕 성당들과 달리 비어 있는 느낌이 주는 공간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비감이 스며든 공간을 만난다. 



신랑 입구에서 바라본 내진 


성당 벽은 아케이드층, 그 위에 복도가 있는 갤러리, 트리포리움층 그리고 채광창의 4 층 구조다.  노아용대성당 건축에서는 격자(grid) 구조라는 매우 중요한 건축 개념을 처음 시도했다. 격자 구조가 묘듈(module)이 되어 올라가면서 점차 작아지는 묘듈을 쌓는 식으로 벽을 지었다. 격자 구조를 모듈로 사용해서 성당 벽은 높아지고 얇아졌다. 다발 기둥으로 예전보다 더 가늘어졌다.그리고, 수평의 벽구조를 가로질러 다발 기둥들이 수직으로 아치 천장까지 올라가 수직성을 강조했다. 이 수직 기둥들은 성당 바닥에서 솟아 4 분 아치 궁륭 늑재와 한 구조로 융합돼 뾰족한 아치 곡선 구조를 완성했다. 이렇게 뾰족 아치 곡선 구조가 어우러지는 리듬은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종교적인 이미지를 담는 밝은 공간을 창조했다. 고딕 성당에서 밝음은 눈부신 공간이 아니고, 창으로 빛이 흘러 들어와 성당 내부의 기둥과 벽에 반사 되어 성당 안 어디도 그림자가 지지 않는 밝음을 말한다. 이런 그림자 지지 않는 밝음을 담은 공간을 누아용대성당에서 처음 만난다. 성당은 고딕 건축 양식의 긴 역사가 시작하는 시기에 지어 뛰어난 조각이나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도 없다. 그래서, 성당은 화장하지 않은 순박한 민 낯을 보여주는 성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 눈에 압도하는 충격은 없지만, 일부러 꾸미지 않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우러나는 맛이 있다. 어찌 보면 바로 이게 이 성당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성당을 그물망을 짜듯 짓는 ‘격자 양식’은 누아용대성당에서 처음 시도됐다. 이 격자 구조 양식은 파리성당처럼 높은 고딕 성당 건축에 짓는 데 필요한 고딕 건축 양식의 기본 구조로 발전했다. 


격자 양식의 성당 벽 구조

성당 찾아가는 길  

보리밭 지나, 강 넘어, 길 잃어 다시 보리밭

타는 8 월 태양 아래

황토 벌판 헤메다 

저녁 무렵 붉은 노을 등지고

다다라

삐걱, 

무거운 문 비집고 들어서니 

투명한 안개처럼 다가오는 고요함

밖은 이미 어두운데 

어디에도 그림자 지지 않는 

밝게 우러나는 정적

한낮 태양 그슬러 일어난 성난 마음 잠재우는

서늘하게 저며오는 따뜻한 적막함 


남쪽 익부: 로마네스코 양식으로 고딕의 가벼움을 말하다

    노아용대성당 하면 지나칠 수 없는 백미, 남쪽 익부를 감상하자. 성당 교차랑에 서면 ‘내진보다 아름답다’는 남쪽 익부로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남쪽 익부는 둥근 새장 모양의 반원형 구조다. 


남쪽 익부

기둥들이 마치 새장 살처럼 올라가 익부 벽을 9 구간으로 나눈다.  남쪽 익부 벽 구조는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서 창-트리포리움-창-창의 4 층의 독특한 구조다. 4층 구조의 맨 아래 창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심플한 창을 냈다. 하지만, 3, 4 층에는 큰 아치 창을 짓고 맨 아래 창과 아치창 사이에 장식처럼 작은 트리포리움층을 장식으로 끼워넣었다. 트리포리움층과 3층은 안 쪽으로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작은 복도을 짓고, 반대로 4 층은 바깥쪽으로 복도를 내 무게의 균형을 잡았다. 그래서, 교차랑에서 바라보면 트리포리움 아래 일층과 트리포리움 위 3, 4 층은 모두 큰 아치창이어서, 익부 전체가 마치 스크린을 두른 것 같다. 특히, 트리포리움층 복도는 신랑과 내진의 갤러리 복도와 그대로 연결했다. 여기서 내진 쪽에서 온 성직자와 신랑에서 온 일반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만나 종교적 혹은 개인 문제를 상의했다 한다 (중세에는 내진에는 일반 신도들에게는 출입 금지되어. 일반 신도들이 신랑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내진은 성직자 구역이었다.). 


남쪽 익부, 이층 트리포리움층과 삼층 창문층에 난 좁은 복도를 볼 수 있다

    남쪽 익부 기둥들은 가늘다. 이 가는 9 개 기둥들이 익부의 4 층 구조를 가로 질러 수직으로 올라가4 층 창문 층에서 그대로 아치 천장 늑재가 되어 휘어져 아치 천장 꼭지점에 모두 만나 마치 둥근 새장 살처럼 아치 곡선을 만들어 익부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반원 입방체 구조로 묶는다. 물러나 보면 익부 벽을 마치 앏은 막을 펼쳐 둘러싼 것 같고, 남쪽 익부 안으로 빛이 잘 들어와 언제나 밝은 느낌이다. 장식 하나 없이 기둥과 창의 구조 만으로 지어 이렇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을까? 남쪽 익부의 기본 구조는 둥근 아치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랐지만 건축 정신은 이미 고딕에 와 있다. 성당 남쪽 익부는 높은 고딕 양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아송대성당 남쪽 익부로 발전했다. 


장노교 종교 개혁자, 칼뱅 기념관을 가다.  

    성당에서 한 구간 내려오면 네거리 모서리에 장노교단을 설립한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박물관이 있다. 칼빈 생가 터에 지은 아담한 삼층집이다. 칼뱅의 종교적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다. 그는 여기서 태어나 성장한 뒤 파리로 유학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생가는 16세기 말 카톨릭 광신도들에 의해 파괴 된 후 여러 번 파괴되고 신축됐다. 1984년에서야 지금 보는 모습으로 증축됐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빈 집처럼 적막하다. 층층마다 칼뱅이 남긴 꽤 많은 자료들이 깨끗이 정리돼 있다. 특히, 최초 불어 번역 성경과 칼뱅이 저술한 기독교 강요 원본은 프랑스가 아끼는 주요 문화재이다. 방명록을 뒤적이니 파리장노교회 ㅇㅇㅇ 목사님이 쓴 한글이 눈에 들어온다. 십년 전 처음 왔을 때는 한글이 눈에 띄지 않았고, 몇 년 전에는 간단한 한 줄 ‘ 바삐 왔다 갑니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목사님 100 분도 넘게 다녀갔음’ 어느 목사님의 기록 ‘칼뱅 생가 박물관은 아주 중요한 문화유산인데 누아용시가 너무 무시해, 화가 남’. 안내에 물어보니 자선 모금 받아 자원 봉사자들이 운영한다고 한다. 누아용에는 개신교는 없고, 자신도 여기 주민이 아니라 한다. 10 유로 자선함에 넣고 박물관을 걸어 나오며 떠오른 생각 하나. 성질 급한 목사님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박물관 앞 작은 꽃밭에 맨드라미가 소담하게 웃고있다. 늦은 오후, 햇살이 따갑다.


캘빈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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