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by 조은이

어느 날 언니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그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루이제 린저 소설 ‘생의 한가운데’를 읽으며 전개가 헷갈리고 좀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계속 읽었다. 한 번 읽고 이해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두 번을 읽었을 때는 그저 막막한 뭔가가 전해지는 듯했다. 세 번을 읽고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한참 쏟았다. 혼돈의 시대에 주도적 자유를 살고자 했던 여자 주인공 니나와 긴 세월 그녀를 사랑한 슈타인 박사, 니나의 삶을 엿보게 되는 니나 언니... 책 속 인물들을 통해 내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한 공감을 얻는 느낌이었고, 내가 몰랐던 나를 대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소설책 읽는 것에 빠져있었다. 도서관 사서가 꿈이라는 은정이에게 수십 권의 책을 빌려 읽었었다. 은정이는 내가 중학생이 되어 만난 친구였고, 공부도 못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공부를 잘했었다. 나처럼 언니 것을 물려받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시장에서 브랜드 짝퉁 옷만 입고 다니는 것처럼, 좀 없어 보이는, 알고 보니 은정이가 입고 신고 메고 다니는 모든 것들은 브랜드 진품이었다. 개발되지 않은 못 사는 동네에 산다고 들었고, 은정이 부모님은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할머니는 시장통에서 파라솔 아래 과일 바구니 몇 개를 두고 과일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은정이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갔고, 나는 은정이도 나처럼 집안일에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 상황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버지와의 다툼 이후로 아버지가 집에 와 있을 때면, 나는 집에 빨리 가고 싶지 않아, 여러 핑계를 만들어 늦은 저녁에나 집에 들어가곤 했었다. 주로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날은 학교 운동장 구석 나무 그늘 벤치에 누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하늘 구름이 그날따라 빨리도 움직인다 싶었는데, 갑자기 은정이 얼굴이 나타났다.

“용남아, 집에 안 가?”
“응, 너는 왜 이제 가?”

“나 주번이잖아.”

“아...”

“왜 이러고 있어?”

“그냥, 하늘도 좋고, 음악도 좋아서... 갈 곳도 없고...”

“울 집 가서 라면 먹을래?”

“집에 아무도 없어?”

“응, 대학 다니는 오빠들은 맨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엄마 아빠는 가게 문 닫아야 들어오거든, 나 이번 주에는 주번이라 늦게 하교해서 학원 안 가도 돼.”

“너, 학원 같은데도 다녀?”

“응, 주요 과목만”

“그래서 네가 공부를 잘하는구나... 그래 가자.”


우리는 시장통 입구 과일 노점을 하는 은정이 할머니에게 들러, 할머니가 깎아 주는 참외와 사과 몇 쪽을 얻어먹었다.

“할머니, 오늘 얼마나 팔았어?”

“우리 손녀 과잣값은 벌었지. 공부하느라 고생했지? 요기 앉아”

할머니는 파라솔 그늘진 자리에 우리가 앉을자리를 만들어 주며 무거운 은정이 가방을 받아 내려 주었다.

“내 친구 용남이.”

“동무도 요기, 요기 옆에 앉아 과일 좀 먹고 가.”

우리 할머니는 내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목소리가 시끄럽다고, 할머니 요강을 씻어 주지 않는다고, 내 외모가 남자애처럼 생겼다고, 그냥 눈에 띄면 꼴 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었다. 은미네 할아버지, 할머니, 은정이 할머니까지 다들 손녀에 대한 애틋함이, 어린 내 눈에도 보였었는데, 어째서 우리 할머니는 그리도 내가 미웠는지... 참외를 깎아 단물이 손에 묻는다고 손수 입에 넣어 주는 은정이 할머니 주름진 손이 오래오래 내 가슴에 좋은 느낌으로 자리했었다.


낡은 기왓장과 양철 지붕 아래 부서진 콘크리트 벽 사이 나무판을 덧댄, 나지막한 집들이 들쑥날쑥 능선을 만들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 한가운데 빨간 벽돌로 우뚝 서 있는 2층 양옥집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저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은정이 옆에서 걸었다.

“우리 집에 다 왔어.”

2층 양옥집 대문 앞에서 은정이가 말했고, 나는 잠시 놀랐지만 2층에 세 들어 사나 했었다. 은정이가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멋스러운 철 대문을 열었고, 잘 가꾸어진 잔디에 적당한 크기 바위와 꽃나무들이 어우러진 정원을 지나, 1층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은정이를 보고서야, 은정이네구나, 했었다.

“너희 집 정말 좋다.”

거실 천장 화려한 크리스털조명과 파란 불빛이 비치는 어항에 색색 가지 물고기가 오가고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하얀 레이스 덮개가 씌워진 피아노가, 반들반들한 가죽 소파와 ‘주말의 영화’에서 본 미국식 전화기를 보면서 은정이네가 정말 부잣집이구나 각인되었었다.

은정이 방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세트로 갖춰진 침대와 옷장 책상까지 완벽했고, 오빠들이 사용하는 2층에는 미니 도서관을 만들어 놓은 듯 엄청난 책이 있었다. 은정이는 엄마가 오빠들에게 사준 책이지만, 오빠들은 손도 대지 않아 자기가 열심히 읽는다고, 내게 어떤 책이든 빌려 가라고 했었다. 사실 대학생 오빠들 미니 도서관에는 청소년이 보면 안 되는 외설 잡지부터 금지 서적도 종종 있었고, 나는 학교 도서관이나 만화방에서 볼 수 없는 책이 많은 은정이 집 2층 도서관이 은근히 좋았었다.


반에서 꼴찌 쪽에 가까웠던 나는 성적이 좋아 앞쪽에서 노는 은정에게 친해질 계기가 없는 부류의 아이였지만, 은정이는 어떤 부류에도 거리낌 없이 어울릴 줄 아는 아이였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은정이가 하교 후 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은정이네 집 2층에서 놀았고, 은정이는 자신이 왜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은지를 말해 주었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아빠가 나 데리고 큰오빠 찾으러 큰오빠 대학교에 간 적 있거든.”

“왜?”

“큰오빠가 대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학생운동만 하고 다닌다고, 아빠가 엄청나게 화나서 차 몰고 나가니까, 엄마가 아빠 걱정돼서 나더라 아빠 차에 타고 같이 가라고 했었거든. 나는 속으로 대학생은 운동 같은 거 하면 안 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까, 체력 단련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더라고... 아무튼 그때 큰오빠 대학교에 가서 대학 도서관에 가 봤는데, 글쎄 도서관에 잘생긴 오빠들이 너무 많은 거야. 나중에 작은오빠 다니는 대학 도서관에도 가 봤는데, 연예인 같이 생긴 오빠들이 정말 많더라고... 잘생긴 남자들은 대학교 도서관에 다 있더라고. 나는 문헌정보학과에 가서 대학 도서관 사서가 될 거야.”

“야, 잘생긴 남자 구경하려고 사서가 되겠다는 거야?”

“응, 잘생긴 남자 만나서 빨리 결혼하려고.”

“잘생긴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겠지?”

“그치? 내가 좀 예쁘잖아.”

“너 농담하는 거지? 너는 예쁜 쪽이 아니라, 뭐 그냥 평범한 쪽이야.”

“대학생 언니들처럼 화장만 잘하면 나도 예쁜 쪽이야.”

은정이는 어떻게 보면 순수하다 싶으면서도, 자기 인식이 좀 안 되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은정이는 어릴 때부터 나이 터울이 많은 두 오빠와 늦둥이 딸을 둔 부모님에게 이름이 아닌, 우리 공주로 불리고 있었고, 우등생들 사이에서 은정이 별명은 백지 공주였다. 나는 그런 은정이의 자기 인식이 부족한 천진난만한 자신감이 좋아 보였고, 자기 인식이 부족하듯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에 편견이나 판단이 없는 것 같아 편안한 친구였었다.


“은정아, 나도 너처럼 도서관 사서가 되어 볼까?”

“응, 나랑 같이 가자. 너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잘생긴 남자 만나서 시집가는 게 좋겠다, 싶지?”

“나는 공부 못해서 대학 문턱도 못 가.”

“지금부터 하면 되지.”

“우리 내년에 고3이야. 나는 기초가 안 돼서, 따라잡는 건 불가능해.”

“아니야, 우리 학원에서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들만 추려서 주거든. 내가 가져다줄 테니까, 그 문제만 달달 외워.”

“암기도 최소한의 기본이 있어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커닝도 기본은 알아야 제대로 된 커닝을 할 수 있다고”

“올해부터 하는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게 꼭 학교 공부만 잘해서 되는 건 아니라고 하던데? 우리 학원 선생님이 그러는데, 일반 상식이 풍부한 학생들이 유리하대. 애들이 그러는데, 용남이 네가 공부는 못해도 아는 게 많다던데?”

내가 아는 게 많다는 것은 학교생활 외적으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안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약재 포장에 필요해서 어디서 가져다 쌓아 놓은 신문 폐지들에서 재미있는 기사나 사건들을 읽었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갖가지 잡지식과 뉴스를 애들 수준에 맞춰 전하는 정도였다. 학교 성적에 별 관심 없는 내가 오만가지 세상 이야기를 주절대고 있는, 성적 올리는 것 말고는 목표가 없는 애들에게 내 수다는 잠시 잠깐 이탈된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학생에게 학교 공부가 일반 상식 아니냐?”

“그런가? 선배들도 뭘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긴 하더라. 그래도 용남이 너 책 스토리 텔링 들어 보면 머리 엄청 좋은 것 같아. 영미가 네가 들려준 이야기 듣고 방학 독후감 숙제해 내서 상 받은 적도 있잖아. 걔도 참, 책 읽고 독후감 쓸 생각 안 하고, 너 이야기만 듣고 독후감 숙제할 생을 하냐? 웃기다. 아무튼 내 생각에 너는 전달력이 뛰어나, 전달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요점 파악이 빠르고 이해력이 좋다는 거 아니냐? 그니까, 내가 가져다주는 문제 보면 금방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을 거야.”


75년생 고3부터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수학능력시험으로 대학 진학 선발이 진행되었다. 생소한 입시 대비로 학교 선생님들도 우왕좌왕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했고, 공부를 좀 한다는 선배들은 수학능력시험을 망쳐, 대부분 재수를 필연이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었다. 76년생 우리는 작년 선배들과 같이 경쟁해야 하는 재수 없는 현실에 놓였고, 시내에 있는 학원은 학생들로 넘쳐났었다. 공부를 좀 한다는 아이들은 과외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은정이도 오빠 대학 후배들에게 과외받느라 힘들어 죽겠다고 했었다.


“미쳐버리겠어, 용남아. 너는 좋겠다. 부모님이 대학 안 가도 된다고 허락한 거지?”

“허락은 무슨 허락이야, 우리 집은 언니 하나 잘 돼서 엄마 아버지 자랑이면 되고, 나는 그저 집안일이나 도우라는, 기대할 게 없는 자식이라는 말이지 뭐.”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수학능력시험에서 생각 이상의 점수를 받았고, 담임은 내게 4년제 대학에 써 볼만하다고 했었다. 엄마는 내 이름이 남자 이름이라, 남고 애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니냐 했지만, 담임 면담을 하고 돌아와 걱정이 앞섰었다. 엄마 계획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가게 일을 완전히 맡기고, 엄마는 아버지 산골에서 아버지를 도울 생각이었는데, 내가 어이없이 대학 갈 성적을 받아 버린 것이었다.

“참 희한하지! 너처럼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맨날 신문 쪼가리에 나오는 객쩍은 기사나 만화 같은 거나 보고 키득거리고, 라디오만 듣고 사는 게 왜 그런 성적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네?”

“엄마는 내가 성적 잘 받은 게 어이가 없지? 어쩌나 싶지?”

“용남아, 너 대학 갈 생각 없었잖아? 한의사 네 언니 덕분에 우리 가게로 약재 주문이 많이 들어오잖아. 아버지 농사일도 바빠서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월급 많이 줄 테니까 가게 일하면서 돈이나 벌지?”


나도 사실 당황스러웠다. 대학에 뜻이 있어 수학능력시험을 본 게 아니었고, 대학에 간다고 해도 무슨 과를 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었었다. 하지만, 엄마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반감에 나는 4년제 대학 문헌정보학과에 지원서를 내 버렸다. 은정이도 예상보다 좋은 성적이 나와서 서울 명문대에 갈 수 있었지만, 은정이는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학교에 다니고 싶다며, 가까운 지방 사범대 장학생으로 지원했다. 라디오에서 듣기에는 수학능력시험이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책이나 신문을 잘 봐 왔던 학생들에게 유리했다고 했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대학 문턱에 발을 내디뎠고, 95학번 대학 생활을 꿈꾸며 대학에서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고 싶었었다.

이전 05화1992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