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합격 통지서와

by 조은이

대학 합격 통지서와 등록금 고지서를 받은 엄마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용남아, 아버지가 여기저기 일을 좀 벌이더니만, 요즘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걱정이 많아, 대출 연장도 안 해 주려고 하고, 계약해 둔 약재도 취소가 들어오고.... 약재 가져간 약방에서도 대금이 안 걷혀서 찾아가 보면, 돈이 돌지 않아 문을 닫은 곳도 있단다. 아버지도 요즘 골치가 아픈가 봐. 아버지 하고 나는 꿈에도 네가 대학 간다는 생각은 못 했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게가 잘 돼서 일이 많다고 대학 가지 말라고 하더니, 대학 가니까 이제는 수금(收金) 안 돼서 대학 가지 말라고? 언니 취직할 거잖아?”

“네 언니 같은 학교 선배하고 결혼할까! 하던데. 언니 결혼한다고 나서면 결혼도 시켜야 할 거 아니야?”

“결혼해도 일할 거잖아? 언니가 못한대?”

“시집 될 집이 한방 병원을 크게 하는 집이란다. 시어른이 대학교수 겸 병원장이라, 시어른 밑에서 배우면서 일할까, 하던데... 시집 일하면서 친정 신경 쓸까 봐 언니한테는 아무 말 안 했지.”

“왜? 집 어려울 때 잘 난 맏딸 덕 좀 보고 살면 안 돼?”

“네 언니한테 우리가 뭘 해줬다고? 어려운 공부 잘하고 좋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만 해도 부모가 돼서 얼마나 고마운데, 친정 어려운 거까지 부담을 줘야 해?”
“엄마는 언니가 힘든 길은 보지도, 듣지도 말고, 좋은 길만 갔으면 좋겠지?”


언니는 항상 빛이 드리워진 좋은 길만 가게 하고, 내게는 집안의 그늘진 길을 가게 하면서 빛 아래에서 빛나는 언니는 세상에 자랑이고, 그늘진 곳에서 보이지도 생색도 나지 않는 집안일 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언니처럼 의사가 될 것도 아니고? 건어물집 애처럼 학교 선생이 될 것도 아니고? 은미가 똑똑하지, 할머니 할아버지 부양한다고 취직부터 하는 거 봐라. 네가 가려는 과가 뭐라고? 도서관에 일하는 과라고? 그런 과 가서 취직은 되겠어? 그런 공부한다고 비싼 등록금 내고... 아이고 참.”

“그만해 엄마. 나도 대학 졸업하고 회사 취직해서 내 살길 찾을 거야.”


그렇게 엄마와 다투고 감정이 상해 가면서 마련한 입학금으로 학교 등록은 했지만, 1학년 한 학기를 보내고 있을 때부터 은행에 대출금 상황이 밀려 독촉 고지서가 집으로 가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1학년을 겨우 마치고 휴학계를 내고 가게 일을 열심히 도왔고, 그런 형편에 언니는 같은 과 선배와 결혼식을 올렸다. 시댁에 들어가서 살게 되어 큰돈 드는 혼수는 하지 않았지만, 맏딸 결혼식만은 형부 집안 수준에 맞추느라, 아버지는 또 빚을 내야 했었다. 엄마는 사돈댁이 양반이라 똑똑한 며느리면 된다는 말로 우리 상황을 배려해 주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관광버스를 전세 내 시장 상인들과 동네 사람들을 태우고 서울 호텔에 가서 그런 결혼식을 꼭 해야 했었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 분위기와는 달리 뉴스에서는 나라가 부도 위기에 있다는 보도는 나오지 않았었다.




1997년 11월 21일 경제부총리가 특별 기자 회견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나랏빚이 총 1,500억 달러가 넘고, 이 가운데 지금 당장이라도 갚아야 할 돈이 많은데,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4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용남아, 저게 무슨 말이야?”

“나라가 부도났다는 소리야.”

“나라가 부도나면 어떻게 돼?”

시장통 사람들은 경제부총리 기자 회견이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실감은 당장 나지 않았었다. 엄마도 나라 부도가 작은 가게 하는 서민들에게 크게 영향이 있겠냐 했었다. 대한민국 부도 선언은 소도시 시장통 골목을 완전히 초토화해 삼켜버렸었다.


2대째 참기름 집을 했던 박 씨 아저씨는 가게가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고, 홀로 아들을 키워낸 떡집 아주머니는 전 재산을 아들이 금융권에 투자했다,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주머니는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다고 했다. 트럭에 과일을 싣고 전국을 떠돌았던 부부가 겨우 마련한 과일 가게는 제대로 자리도 잡기 전에 닫아야 했고, 은정이네 건어물 가게도 문을 닫았다. 생선 가게 아저씨 아주머니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야반도주했고, 국밥집 아주머니는 생선 가게 아주머니에게 빌려준 돈을 떼이고 파출부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약재상 가게 건물 주인이 은행 이자를 갚지 못해 건물이 법원 경매에 넘어갔고, 은행에 잡혀있는 집조차 넘어갈 상태에 놓이게 되었었다.


군대에 간다는 대학 남자 동기와 선배들이 넘쳐났고, 그나마 형편 괜찮은 선배들은 취업할 곳을 찾지 못해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다는 말도 들여왔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그만둔다는 친구들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내 휴학계가 자퇴서가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했었다.

아버지는 집이라도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대구 어른댁에까지 다녀왔지만, 어른 장례 이후 소원해졌던 어른댁 자식들에게 말도 못 꺼내 보고 돌아왔었다. 결국 집에 빨간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급한 대로 집을 나와 허물어져 가는 산골 집으로 옮겨야 했고, 아버지는 농사짓는 것을 포기하고 술로 나날을 보냈었다.

연일 보도되는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대량 실직 사태로 가정이 해체되고, 생활고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뉴스들이 넘쳐났었다. 나는 아버지가 혹 술에 취해 그런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될까 봐, 마음 졸이고 아버지를 주시했었다. 아버지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기도 하고, 어느 날은 산꼭대기 절벽에 앉아서 해 질 녘까지 먼 곳만 응시했었다. 그런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어디에 누구에게 기도했는지도 모르지만, 기도 했었다. 저런 모습이라도 괜찮으니 죽지만 말아 달라고.... 나라 부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시작된 금 모으기 국민운동은 언론, 시민단체 주도로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하였고, 혼란해진 사회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움트고 있었다.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직전까지 문민정부의 금융 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과잉투자를 벌였었다. 최고 권력자와 위정자들의 안일한 국가 운영으로 나라 부도를 막지 못한 것을 생계에 몰린 서민들이 책임지고 있는 꼴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로 살았지만, 혼자 사라지는 일은 없어졌다. 엄마가 출산을 앞두고 분가한 언니에게 가서 살림을 살아 주기로 하면서, 언니가 얼마의 돈을 마련해 주어, 나는 고등학생이었던 영미와 초등학생 승천이를 데리고 읍내 월세 단칸방을 얻어 동생들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엄마는 서울 고층 아파트에서 언니와 사는 것이 좋은 듯, 통화를 할 때면 언제나 목소리가 좋았었다.

“엄마는 산골에 사는 아버지 하고 할머니 신경 안 쓰여?”

“할머니야 아들 잘못으로 빈털터리가 됐는데, 어쩌겠어? 네 아버지 공장 그만둘 때부터 내가... 아이고 됐다. 생각하면 속이 천불 난다. 네 언니 아니었으면 영미도 승천이도 학교나 제대로 다녔겠냐? 너 언니한테 투덜대지만, 언니만한 아우 없는 법이다. 언니한테 잘해라.”

나는 언니가 고맙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언니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라 여겨지면서도 언니는 여전히 우리 집 기득권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 같았었다. 대학을 자퇴하고 직장을 얻어 동생들과 자취 살림을 꾸려 사는 나는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희생을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대학 진학을 생각하지 않았던 은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시외버스 터미널 버스 회사 경리로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사라진 오빠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 은미 엄마는 자리보전하고 누워버렸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은미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며 일찌감치 취직해 집안의 가장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는 은미에게 버스 회사에 일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고, 버스 회사도 사정이 좋지 않아 최소한의 인원만 근무하고 있었지만, 마침, 오래 일한 매표소 여직원 한 명이 실직한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게 되어,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 첫 차부터, 어둠이 점령한 늦은 밤 막차까지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매표소 일은 육체적 노동은 아니었지만, 영화에서 본 감옥 독방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독방에 갇힌 내 육신의 조임과 영혼의 매임으로 어두워진 정신을 다독이고 헤아릴 여유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어디든 일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현실에 나는 안주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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