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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미 안투네즈 Dec 12. 2022

잠시 눈을 감고 있어요.

Robin of Modern Times by John Roddam Spencer Stanhope




대학생 때 두 번의 연극을 한 적이 있다. 주인공을 하고 싶었지만 두 번 다 조연을 맡았다. 특히 두 번째 연극에서는 주인공의 늙은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

'나도 주인공이 하고 싶어. 나도 예쁘고 젊고 성공한 여자 주인공을 맡고 싶어.'라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곧 죽을 날을 앞둔 할머니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건 몸집이 작고 목소리가 약한 너만이 할 수 있어'라는 선배의 말은 조금도 가슴에 와닿지가 않았다. 나는 나의 역할이 싫었다.


그렇게 하기 싫은 감정을 한가득 떠안고는 매일같이 연습을 반복했다. 그리고 최종 리허설 날이 다가왔을 때 나는 죽기 직전 손자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기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나는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고 역할에 흠뻑 빠져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며 기쁨이 차올랐다. 그리고 리허설이 끝났을 때 모두가 나에게 다가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며, 닭살이 돋았다며 나의 연기를 칭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있었던 실제 공연에서 주인공은 나였다. 연극이란 그런 것이었다. 예쁘고 아름답고 성공한 역할이 주인공이 아니라 역할에 가장 몰입해 있었던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모든 사람들은 주인공이 아닌 내게 다가와 사진을 찍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연극의 줄거리도, 대사 한 줄도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최종 리허설을 하던 그때만큼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세포 속에서 기억하고 있다. 완전한 몰입의 순간. 죽을 날을 맞이 한 할머니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던 그 순간. 그리고 산다는 것은 그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생생하게 느끼기 위한 하나의 연극 무대라는 생각을 한다. 매일을, 매 순간을 뇌 속에 새겨진 습관이라는 시나리오를 따라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과 완벽하게, 생생하게 하나가 되는 것.




얼마 전 김보영 작가의 '다섯 번째 감각'이라는 책을 읽었다. 작가의 초기 글들을 묶은 단편집이었는데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촉각의 경험'이라는 단편이 가장 황홀하고 좋았다. 작품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세계에서 오직 인간의 장기 보존을 위해 살아가는 클론이 우연한 기회로 인간의 꿈을 볼 수 있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처음으로 감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클론에게는 모든 것이 황홀한 체험이고 기쁨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판단하는 고통이나 슬픔일지라도, 작고 사소한 느낌일지라도 완벽한 어둠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클론에게는 놀랍고 아름다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화려한 외부 세계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정작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나만이 체험할 수 있는 황홀한 기쁨을 스스로에게서 빼앗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저 햇빛이 비치는 것, 빗방울이 손끝에 닿는 느낌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고통이 가슴속에서 퍼져가는 전율, 슬픔이 몸을 끌어당기는 무거운 느낌 하나하나가 그저 체험이고 사랑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고 살았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왜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러한 모습으로 삶을 체험하고 있을까. 왜 아름답고 화려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결국 나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밖에는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다. 사랑이라서 사랑밖에는 선택할 수가 없다. 사랑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이다. 햇빛도 사랑, 빗물도 사랑, 고통도 사랑, 슬픔도 사랑. 우리의 모습이 고통이라면 고통이 두려워 고통을 피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 고통을 선택한다. 오직 사랑만이 고통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기꺼이 외롭기를 선택하고 좌절하기를 선택하고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왔다. 우리는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은 무엇 하나 이곳에서 체험하지 못했다. 우리는 기꺼이 그 선택을 했다. 그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지금의 나는 오직 나만이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평생 색맹으로 살아온 남자가 처음으로 색을 보게 되었을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에게는 꽃의 노란 잎을, 나무의 초록 잎을, 하늘의 하얀 구름을 보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공간 속의 모든 경이로움에 완벽하게 몰입되어 있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절망 속에서 좌절 속에서 우울 속에 갇혀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생하게 빛을 보기 위해, 단순한 것의 가치를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기 위해 잠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주인공은 바로 당신일 것이다. 완벽하게 좌절해 봤고 실패해 봤던.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감정에 짓눌려 발버둥 쳐본 당신만이, 생생하게 그 순간에 몰입해 있던 당신만이 바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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