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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 May 20. 2020

내 시간의 가치를 의심했던 밤들에게,

런던에서 살아남기#5


불면증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해당된 적이 없었다.

언제 어디에서도 머리만 대면 자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 바로 나였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혹은 시차가 있어서 잠에 쉽게 들 수 없다는 사람들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신체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몸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런던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고 느끼던 즈음, 분명히 머리가 닿았는데도 멀뚱멀뚱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할 일을 다 하고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데, 이즈음이면 분명히 핸드폰을 얼굴에 떨어트릴 위기를 몇 번 맞이하고 스르르 잠들어야 하는데 내 정신은 너무 또렷했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잠들어야 하는 내가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잠들기 힘든 밤이 드문드문 생겨나던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자려고 누워서 스탠드를 껐는데 방 안이 환했다. 처음에는 내가 다른 스탠드를 켜 뒀었나 했는데 그 빛의 정체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창문은 유난히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이 잘 보였는데, 낮에는 그저 햇빛이 많이 들어와서 덥다고만 느끼면서 밤에 들어오는 달빛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빛 대신 달빛이 방안을 채우는 밤은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잠들고 나서도 달은 아침까지 조용히 떠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서 그랬는지, 마치 누군가가 내가 잠들 때까지 지켜봐 주면서 마음 놓고 자도 된다고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부터 나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즈음부터 달이 떴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다른 지도 몰랐었던 달의 일출, 일몰 시간을 알려주는 어플까지 설치해 그 시간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뜨면 뜨는 대로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아무렇지 않았던, 그저 당연했던 것이 어느 날은 하루 중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곤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나에게 훨씬 더 좁은 이해의 폭을 가지고 있는 나는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나를 더 몰아세우곤 했다. 멀쩡한 직장을 관두고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랬고, 스스로 이른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금 떠났다 돌아오면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결심을 하자마자 밀려오는 불안감과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 사이에서 매 단계마다 성과를 내야 했던 유학 준비 과정을 지나 도착한 런던에서도 별 차이는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무시무시한 전제조건이 이 시간이 지난 후에 무언가는 달라져야 한다며 스스로를 더욱더 다그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두운 생각들과 혼자만 깨어 있는 것 같은 밤들을 견디던 어느 날 하늘에 뜬 달을 보며 단순한 위안을 받고 보니, 또 그렇게 작은 즐거움들을 찾고 또 찾다 보니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나의 도전은 무언가를 이뤄내기보다 이런 사소한 깨달음을 엮어 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 정도쯤은 견뎌야지 하면서 나를 몰아붙이거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가 되어보는 시간에 적응하면서 아주 작은 일에도 웃음 짓고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그래서 달이 떴다는 사실 하나에도 위안을 받는),  그래서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한 마디 정도는 더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하게 된 것이다.






개인이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의미나 가치는 그 자신만이 오롯이 느끼고 안다.
숫자나 물리적 성과로 그것을 재단하려 해도 스스로 이 일이 충분히 의미 있음을 느끼고 나면 
그 경험의 가치들은 잘려나가지 않는다. 

- <당신의 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中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한구석 살릴 수 있다>, 강준서



나는 여전히 이 시간의 결과를 모른다.

하나하나 쌓아온, 지금도 쌓아가고 있는 이 시간들이 그 다음장으로 어떻게 연결될지 혹은 연결되기는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매일 밤 뜨는 달을 보며, 그 달에 비추어지며 나 스스로와 함께 지나온 그 시간들이 의미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경험의 가치들이 내 안에 자리 잡아 언젠가는 반대로 빛을 내리라는 것도 믿어보고 싶다. 믿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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