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선배님을 관찰하며
탄약 사령관님의 초도순시(初度巡視, 한 기관의 책임자나 감독자 등이 부임하여 처음으로 그 관할 지역을 순회하여 시찰함) 현장에 있다. 부대 전 지역의 순찰을 마치신 사령관님의 훈시가 이어진다. 드디어 마지막 순서다. 전 부대원이 모이다 보니 장소는 연병장... 후방지역이라도 위병소 안은 춥다. 오늘의 초도순시를 오랫동안 준비했다. 이제 당분간은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겠지. 훈시 중인 사령관님께는 죄송하지만... 머릿속으로 계속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니 좀 따라가 봐야겠다.
최근 꽂힌 생각은 '여자 군인'이 된 후 생긴 의문들이다. '군인'에 관한 의문들은 주변에 참고할 사람이 많아 해결할 수 있지만, 그와는 결이 다른 '여자 군인'에 관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첫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겪어본 바, 이 조직의 소수 성별이라는 이유로 여자 군인에게는 호기심의 시선이 자주 따라다닌다. 그것을 이해하지만, 시선을 받는 일이 불편한 나는 늘 단체 속에 묻어가기를 원한다. 타고난 성격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겠지만, 부족함을 숨기고 싶은 후천적 이유도 있다. 이 조직에 특화된 능력을 그다지 갖추지 못한 나는, 내가 드러나며 나의 부족함도 함께 드러나는 것이 싫다. (실제로 남자 군인들은 뭘 잘 못해도 안 들키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눈에 띄는 사람이 무언가를 잘하면 잘함이 두드러지고, 못하면 못함이 두드러질 텐데 말할 것도 없이 나는 후자이므로. 또한, 눈에 띄는 사람은 작은 일로 구설수에 오르기 쉽고, 사소한 행동도 왜곡될 수 있어 제약이 크며, 외모 평가도 따라붙기 쉽다. 무엇보다 나는 그것들에 자유롭기 어려운 나이를 지나고 있다. 내가 보는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약한 멘탈로 종종 상처받고, 잘 흘려보내지 못하는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 나는 애초에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느덧 나는 호감조차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체화해 넘길 것인가?
다음은 이 집단에서 다른 성별로 나이 들어가는 것에 관한 막연함이다. 어쩌면 이것은 막연함 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일 수도 있다. 이 직업을 택했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았던 이유. 아름다움이 깃든 강인함을 갖고 싶어서. 턱없이 짧은 시야로 그렸던 당시의 아름다움은 '젊음'을 전제로 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깃든 강인함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일까? 주변에서는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나이 든 남자 군인은 많지만, 나이 든 여자 군인을 거의 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여자 군인으로서 내 미래의 비주얼이 상상되지 않고, 그 막연함은 종종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일단 안티에이징에 힘쓸 수밖에... )
마지막으로는 이 조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현명한 행동에 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군인이지만 대부분의 동료들과 성별이 다른 나는 같은 상황에 처해도 동료들과 다르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 상황 속 나의 적절한 역할에 관해 모르겠다. 성별과 정체성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현명한 것일까. 의논하거나 참고할 대상은 없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추측에 따라 행동하며 나는 자주 헛물을 켜고 있다.
이상, 사령관님의 훈시와 더불어 최근에 꽂힌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행사가 거의 끝나고 있다. 이제 사령관님이 떠나시기 전에 사령관님과 내빈들께 인사드리러 가야겠다. 부디 여느 소대장들 틈에서 악수와 관등성명 한 번으로 묻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근데 저쪽에서 누군가 오고 있다. 처음 뵙는 분이다. 우리 부대 마크인데 저런 분도 계셨던가? 아. 이번 분기에 오신다던 여군사관 7년 직속 선배이신가 보다. 씩씩해 보이신다. 근데 의도된 느낌은 없어 과해 보이지 않는다. (씩씩한'척' 하는 여자 군인을 본 적이 있다...) 근데 멋지다. 화장기 하나 없이 야전에 최적화된 비주얼에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자신 자체로 빛나는 느낌. 뭐랄까. 당당함이 빚어내는 아우라가 있다. 심지어 사령관님이 부르시기도 전에 먼저 가셔서 경례를 하시며 이번에 전입 온 누구라고 본인 소개를 하신다. 숨어서 어떻게든 눈에 안 띄려고 노력하는 나랑 너무 대조적인데? 혹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저분처럼 씩씩해지는 걸까? 그럴 리가..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원래 멋진 분인 듯. 종종 지켜봐야겠다.
창장님이 CP(Command Post, 지휘부)로 부르신다. 개인 면담이다. 일반 소대장이었다면 특별히 말썽을 부리지 않는 한 얻을 수 없는 혜택(?)을 여자 소대장이라 받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지만, 배울 점이 많고 예리한 분이셔서 면담의 자리가 싫지 않다. 소대장과 창장은 업무의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창장님은 지낼만한지 물으시며 오늘은 조언을 하나 해주신다. 이번에 전입 온 선배를 보며 많이 배우라고. 그는 내가 여자로서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롤 모델로 삼기에 부족함 없는 사람이라고.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비슷하다. 통찰력이 뛰어나시고 까다로우신 창장님도 그분이 흡족하신 거다. 덩달아 뿌듯하다. 드디어 '여자 군인' 생활을 하며 품었던 의문들에 구체적인 답을 지녔을 분을 만났다.
창장님이 그분께도 당부하셨는지 틈틈이 그분을 관찰하며, 때로는 그분께 불려 가고 있다; 바쁘신 분이 나를 언제 그렇게 지켜보셨는지 지적들은 꽤나 디테일하다. 경례 시 팔의 각도, 출퇴근 용으로 쓰는 가방 디자인(애초에 강인한 타입은 못 되는 나의 어설픔이 더 부각되지 않도록), 복장 상태(투명 네일도 바르지 말 것)와 경험에서 우러난 군 생활에 관한 조언까지. 나에게 이미 들러붙은 어설프고 약한 이미지를 하나 둘 조언해 주시는 그분과 같이 있으면 그분의 강인한 기운에 편승해 덩달아 강해지는 기분이다. 체력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빈틈없이 맡은 일을 해치워, 지휘관이 무슨 일을 맡겨도 믿음직스럽고 안심된다는 평가를 받는 분. 많이 보고 배워야 한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이유를 어렴풋이 알겠다. 이 선배가 강한 이유는 자기 자신답기 때문이라는걸. 근거 없는 평가나 비판에 연연하거나 휘둘리지 않고(근거 없는 뒷이야기들이 그분을 통과해 무력하게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맡은 일은 기필코 성과를 내고, 성별도 나이도 초월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분.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신 자체가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분. 절대 독불장군 유형이 아님에도 휘어 잡히고 싶은 매력을 지닌 분. 내 생각에 이런 분은 어떠한 일에 종사해도 그곳을 초월해 본인 자체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분이라 여겨진다.
선배는 애초에 나와 성품의 '결' 자체가 다르지만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이분의 초급 장교 시절은 어땠을까? 선배의 현재의 모습을 토대로 지금 나의 길을 그려보는 수밖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행여나 나를 보고 여자 장교는 조금 미숙한가?라고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 있다면 선배를 보고 인상이 바뀌었을 테니. 선배를 보면 이 조직이 사람 보는 눈이 없지 않구나 생각하며 나는 어느새 평가자의 입장에 서고 있다.
명절이다. 동료들과 함께 선배님 댁에 초대받았다. 기혼 여자 군인의 관사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외곽에 있는 원룸 독신자 숙소에 사는 나와 달리 기혼자 선배의 집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넓은) 집이다. 기혼자를 위한 숙소 부족으로 부대에서 민간 아파트를 일부 매수해 관사로 사용 중인데, 그간 방문했던 군인 아파트보다 확실히 넓고 쾌적하다. 그런데.. 넓은 공간을 휑함이 채우고 있다. 그곳이 주(主) 거주지가 아님에서 비롯된 황량함이겠지만, 거실은 TV, 식탁, 냉장고 끝. 침실은 침대 하나. 나머지 공간은 휑하다.
음... 혹시 이것이 나의 미래일까? 1-3년 주기로 근무지를 옮겨야 하는 장교는 결혼해도 가족들과 자주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아이가 어린데 돌볼 여력이 안된다면, 아이는 다른 양육자(할아버지 할머니 등)의 손에서 길러져 배우자는 물론 아이와도 떨어져 세집 살림을 하기도 한다던데...
단정 짓기 어렵지만 지금과 같은 여건이라면, 재직 중에 아이를 직접 키울 여건이 안 될 것은 분명하다. 18시 칼퇴만 보장된다면 어떻게라도 해보겠지만, 훈련 당직 등등으로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고 평일도 대부분의 날들은 야근으로 21:00시 이전 퇴근은 어려울 것이다. 중대장님을 봐도 앞 중대 중대장님을 봐도 다른 선배들을 봐도 분명하다. 남자 간부들은 와이프의 도움으로 육아 공백이 커버된다고 해도(아마 와이프의 독박 육아일 것이다.) 여자군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얼핏 들었던 남자 군인은 여자 군인을 배우자로 기피하고, 여자 군인은 남자 군인을 만나는 편이 이해의 폭이 넓어 괜찮다는 이야기가 이 뜻이었겠구나... 부부가 모두 장교라면 근무지에 따라, 같이 있는 게 힘들만하면 떨어져 살고 그리울만하면 같이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무슨 말인지 너무 알 것 같다.
근데... 선배님은 결혼은 어떻게 하셨을까? 내가 봤을때 이렇게 살면 결혼할 시간도 없을 것 같던데. 물론 그에 앞서 결혼에 뜻이 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군 생활 간에 결혼을 한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나의 미래인 것일까? 격무와 외로움과 고립. 이것은 이 길에 선 여자들의 숙명인 것인가? 그럼에도 선배는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고 명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사실 죽도록 괴로워하고 계실까? 그럴 리가 없다. 아니면 같이 살지 않더라도 남편과 아이가 선배의 심리적 울타리가 되어주는 걸까. 아니면 그냥 강인한 걸까. 물어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의문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선배님이 내어주신 (선배님의 어머님이 만드셨을 것으로 예상되는) 명절 음식이 맛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