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훈련의 날을 지나며
군대는 내가 조금이나마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집단에 몸담고 있는 한, 주어진 직책의 무게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뒤 진지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군인의 존재가치이자 본분인 훈련과 상급부대의 검열과 다시 훈련과 훈련과... 계속되는 당직 근무가.
선배들은 그랬다. 훈련, 검열, 당직 근무만 없어도 군인은 할만한 직업이라고. 초임 간부인 나는 그 말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연간 훈련 중 가장 굵직한 훈련 두 가지를 연이어 앞두고 있는 지금, 긴장감에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새로 오신 창장님이 재임 기간 평가받으셔야 하는 창 전술 훈련과 가장 추울 때 진행되는 혹한기 훈련. 한동안 나는 정말 진지해져야 한다. 정말로 진지... 아니다. 이 상황은 진지하기만 해서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당분간 '나'를 지우고 '군인'으로만 존재하는 게 낫겠다. ‘군인'의 자아로 나를 채운다면 이 훈련의 시간을 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훈련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잠자리에 들며 잠들기 전까지, 다가올 일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본다. 05시에 기상해 전투복을 입고 06시까지 부대에 들어가 준비 태세를 발령받는다. 신속하게 단독군장을 착용하고 안면 위장을 한 뒤, 소대원들을 데리고 탄약고 지역으로 이동한다. 탄약고에서 명령 하달을 기다리며 탄 박스를 옮기다가(훈련 간에 작업을 병행한다.), 명령이 떨어지면 탄약 육로 적송(積送, 물품을 실어 보냄)에 임한다. 밥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 이어지는 탄약고 피폭 상황을 해결하고, 담당 구역 내 초소에서 상황 해제를 기다리며 경계근무를 선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반복한 뒤 행군을 끝으로, 숙영지로 돌아와 인원 장비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위장을 지운 뒤 당직 근무에 투입한다. 머릿속으로 충분히 시뮬레이션되는 이 상황을 몸에 익을 때까지 쉼 없이 반복하다 보면 훈련의 날들은 끝나있겠지.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우니 얼른 자자...
훈련 검열 당직 주말 출근 비상 훈련 훈련 훈련... 고된 일상이 반복되면 매너리즘이 찾아오기도 한다. 곧 한계가 올 것 같아 나를 지우고 군인으로만 존재하기로 한 계획에서 ‘나'와 '군인'의 역할분담으로 노선을 바꾼다. 겪어본 결과 '당근'이 주어지는 상황에는 '내'가, '채찍'이 주어지는 상황에는 '군인'이 나오고 있다. 나를 온전히 지울 수 없다면, 이 고된 시간을 그렇게라도 넘겨 보기로 한다.
나와 군인의 역할분담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자발적으로 군대에 온 여자 군인인 나는 자대 발령과 동시에 장기 복무 희망자의 이미지가 자동으로 덧씌워져 있고(앞날은 모르니 아직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다.), 중대장님은 전역자원인 선임들과 달리 본인과 같은 길을 가리라 예상되는 나를 훈련의 현장 곳곳에 데리고 다니며 구체적으로 교육하신다. 예를 들어 돌발 상황이 발생한 현장에 데려가, 어떠한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유능한 지휘관이 되려면 온갖 경우의 수와 해결 방안까지 미리 꼼꼼히 생각해 두어야 빈틈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다. 물론 배울 것은 많지만, 훈련만으로도 지친 마음속에서는 슬그머니 '내'가 나와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곳에 장기적인 뜻은 없어요... 그렇다면 더는 이 고생을 안 해도 되고, 그런 것까지는 몰라도 되지 않을까요?' 등의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마인드를 장착한 '내'가 되어 개념을 놓고 훈련에 임하다 보면 예리한 선임 소대장은 재빠르게 알아채고 전매특허인 촌철살인을 날린다. 진지한 눈빛에 비해 형편없는 실력과 얄팍한 군사지식을 가진 나를 일찍이 알아본 선임은, 남들 눈에라도 멀쩡한 소대장으로 만들려고 내게 자주 조언하지만(혹은 갈구지만) 나는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고, 급기야는 체력 저하와 수면 부족을 이유로 야간 탄약 적송을 지켜보다 감독은커녕 서서 졸다가 쓰러질 뻔한다.. 결국 아무도 없는 곳으로 불려 가 선임에게 엄청나게 깨지며 다시 정신을 차려 '군인'의 자아를 입고 가까스로 훈련의 현장으로 돌아와 남은 훈련에 임한다. 그 와중에 나는 단 한차례의 인신공격 없이 팩트만 정확하게 짚어주는 선임의 인성에 감탄한다. 그리고 선임은 배울 점이 많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의 말은 경청하는 게 좋은 거니깐... (기분은 가끔 별로여도.) 그렇게 나와 군인을 오가며 종일 훈련에 시달리던 나는 야간 당직을 서며 다시 '내'가 되어 22:00에 병력들을 재우고 초번 근무자들을 초소로 내보낸 뒤…. 초저녁부터 잔다. 근무시간에 많이 안 자서 초기에는 당직 부사관들이 내심 기피하던 간부였던 나는 어느덧 당직 부사관에게 "괜찮으십니까?" 소리를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가까스로 이 시간들을 버티고 있지만 남은 훈련의 날을 헤아리면 갈 길이 아직 멀다. 혹시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잠시 주변을 본다. 중대장님과 선임들과 다른 간부들을 보니 알겠다. 모두 자신의 최선으로 각자의 몫을 필사적으로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 진지함이 내게도 읽히지만 그럼에도 나만큼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혹시 저들 눈에도 내가 멀쩡해 보일까 생각하며 이번에는 소대원들을 살펴본다. 온몸으로 이 시간을 견디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소대원들의 마음이 생생하게 감지되어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휴가는 물론 외박과 외출이 제한되는 군인의 사기는 무엇으로 올릴 수 있을까. 훈련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 찾을 수 없는 답은 일단 접어두고 다시 훈련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주말이다. 아주 잠깐의 숨통이 찾아온다. 오랜만에 아무 일정이 없다. 근무도 없고, 부대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나' 개인이 할 일도 없다. 이 도시에 군인으로서 말고는 삶의 기반이 없는 나는 시간이 있어도 만날 사람이 없고, 갈 곳이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아니다. 다행히 할 것이 있다. 종교 행사를 다녀온 뒤, 적막만이 가득한 숙소에서 나는 미리 사둔 책을 한마디 말도 없이 읽고 또 읽는다. 읽다가 피곤해지면 자고 일어나서 다시 책을 읽다 보면 밤이 된다. 이제 내일을 위해 자야 한다. 그렇게 휴일을 보내고, 새롭게 시작될 다음 주를 향한 두려움을 안고 잠자리에 든다. 만약 기대감이 있다면 두려움을 향한 기대감일까. 예상대로 지난주와 크게 다름없는 새로운 주를 맞이해 훈련 검열 당직 주말 출근 새벽 비상 다시 훈련 훈련 훈련... 얼마간의 그 사이클을 반복했을까.
다시 주말. 체력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른 나는 이제 '당돌한 나'를 끄집어낸다. 당돌한 나는 용기를 내 잠시나마 이곳을 벗어나기로 계획한다. 모두의 휴가, 외출, 외박이 통제되고 있는 그 주말 외부에 사는 나는 겁도 없이 본가로 가는 기차를 탄다. 물론 지휘관에게 보고 없이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며, 들킬 것에 관한 염려조차 않는다. 아니, 차라리.. 들키기를 바란다. 들킨다면 어떤 형태로든 이 시간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멈추고 싶어서. 잠시 이성을 되찾아 이 일이 발각되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이 일은 나 개인이 아닌 여자 군인 전체의 일로 해석되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하다가, 설령 그렇다 해도 그 조차 어쩔 수 없음의 영역으로 넘겨버린다. 이 순간은 그냥 '나'만 보기로 한다.
기차가 출발하고 이 도시를 서서히 벗어나며 나는 예감한다. 이 일탈이 결코 들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기나긴 훈련의 전(全) 과정을 기어이 완주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을 견딤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렇게나마 이 시간을 견디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다음 단계의 고통을 맞이할 것을 예감한다. 내가 없는 주말 이 도시에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매 순간 나는 부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어딜 가도 소대원들과 부대는 내 머릿속 전체를 점령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가족들은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일 밤 기차를 타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은 훈련에 임할 것이다. 기나긴 훈련의 시간을 나는 이렇게라도 견딜 것이다.
끝내는 그렇게 모든 훈련을 마쳤다. 뿌듯함은 없다. 큰 산을 가까스로 하나 넘었다는 생각뿐. 앞으로도 얼마나 큰 산이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무튼. 이제 진짜 공식적인 휴가를 가자. 긴 훈련을 마친 뒤 나는 이 조직의 민낯을 조금 더 알아버렸고, 그래서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