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대장의 시공간에 머물며
특정 업무가 갑자기 떨어지는 날이 있다. 업무를 위한 업무, 행정을 위한 행정을 해야 하는 날. 오늘 같은 날이다. 오늘 갑자기 주어진 업무는 '임무 수행철' 만들기. 직책별로 자신의 업무를 일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 분기 단위, 반기 단위, 연간 단위로 분석해 정기 업무와 수시 업무로 나눠보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본인의 업무를 체계화하고 전문성을 더하자는 취지겠지만, 구체적인 목적 중 하나는 지휘관께 보고하기 위함이겠지. 하루 종일 임무수행철 제작에 매달릴 수 있는 호사는 당연히 없다. 일과시간에는 현장에서 기본 업무(탄약고 관리)를 하고, 임무수행철 제작은 야간에 가능할 테니 오늘도 일찍 퇴근하기는 글렀다. 월별 초과근무 시간은 진작에 상한선을 채웠다.
그나마 위안은 우리 중대는 비교적 최근에 업데이트된 소대장 임무수행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 나(여자 소대장)의 전입에 부대의 관심이 쏠리며, 그간 현장 인수인계 방식으로 진행되던 소대장 지휘 실습이 역대급으로 체계화되어 임무수행철까지 만들며 준비했다는 선임 소대장의 이야기가 있었다. 반은 보여주기식이었을 그 임무수행철이 다시 보여주기식이 될지언정 활용 가능하다니 기쁘다. 덕분에 선임 소대장의 노고가 담긴 탄약 소대장 임무 수행철을 다시 찬찬히 본다.
- 소대원 관리(상향식 일일결산, 수시상담, 전입 신병 특별 관리, 상담 일지 기록 등 군 생활 전반에 관한 관리)
- 탄약고 관리(제초작업, 탄약보급 관리, 탄약 잔량 확인, 탄약고 현장 지역 및 지역사무실 관리 등)
- 각종 훈련(유격, 혹한기, KRFE, 창전술, 동원 훈련, UFG 등) 및 행군
- 각종 근무(당직 근무, 근무 지원 선탑, 간부 순찰 등)
- 소대원 교육(구급법, 경계 등의 병기본 및 탄약보급, 탄약 관리 등의 주특기)
- 중대장 보좌
- 기타 업무(각종 검열 혹은 사열에 따른 창장 지시사항 수행 등)
- 비공식 업무(소대 회식, 소대 단합, 중대 회식 등)
※ 모든 것에 앞서, 군인의 기본 역량(체력측정 및 사격)을 항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수시 점검)
탄약 소대장은 이토록 다재다능(多才多能) 함을 요구받는 직책이었던가. 이것은 그야말로 지(교관 업무) 덕(소대원 관리) 체(체력 관리)의 조화의 극치다. 역시, 언제나 멀티가 잘 안되는 나로서는 힘든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 직업의 본질을 아무리 파헤쳐도 이 건조한 단어들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몰랐다. 이토록 스펙터클한 삶이 존재할 것은. 소대장 지휘 실습 간 잠시 겪었던 중대장님은 그랬다. 그동안 내가 머물던 세계와 군에서 겪을 세계의 갭은 클 거라고. 곱게 자랐다면,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도 이곳의 업무도 감당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지휘 실습 온 그 밤 어두운 차 안에서 한참을 들려주시던 군대의 어두운 면모들. 여자여서(여자분이셨다.) 더욱 가혹했던 일들. 충격이었고 두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기를 들었다. 그분과 나의 군 생활은 다를 것이며, 나도 보기보다 강인한 구석을 가지고 있으며,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버티는 법도 배웠고, 군인이 되는 힘든 훈련도 다 통과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나는 타인의 삶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이라는 것은 아무리 멀리 뻗어나간다 해도, 얼마나 빈약하던가. 우리는 자신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 상상력을 펼칠 뿐이다. 선배님의 경고는 정확하다. 이 삶은 그리고 실무는 결코 녹록지 않다. 특히 나와 너무 다른 삶, 상상할 수 없던 세계, 상상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겪으며 나는 벌써도 많이 상처받고, 마음을 두드려 맞고, 자신감을 잃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자꾸만 약해지는 이유를 안다. 근본적인 이유는 공허와 외로움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무척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라 오해하고 있었으나, 직접 부딪치기 전에는 자신을 모른다. 내가 스스로를 독립적이라 여겼던 것은 항시 함께할 사람들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뿐, 사실 나는 완전히 혼자인 것은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기댈 곳이 있다면 어디라도 기대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 그래서 혼자 견뎌야 하는 이 시간들이 현재 나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이런 거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부대에서 보내며(08:00-21:00 전후), 많은 업무를 하고, 지휘관의 지시사항들을 처리하고, 소대원들을 관리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배우며 때로는 치이고 깨지다 보면 일정 시간은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을 채움 받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충전된 에너지들은 진작에 다 써버린 것이다. 정신없는 하루의 끝에 내가 닿는 곳은 나의 이 방이다. 깊은 적막만이 가득한 4-5평 남짓한 이 방. 침대 책상 냉장고 텔레비전 노트북 하나가 전부인 이 방. 하루의 끝에 이곳에 도착해 다음날을 기다리며 나는 끝내는 깊고 깊은 공허함에 빠져든다. 온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공허. 이 도시에서 내가 머물 곳은 오직 이 방뿐이지만, 쉽게 이곳에조차 곁을 줄 수가 없다.
배우고 싶고 성장하고 싶다. 아주 많이 배우고 아주 많이 성장하고 싶다. 가볼 수 있는 아주 먼 곳까지 가보고 싶다. 나는 지금 이 모습이 나의 완성이라 믿지 않는다. 한참 더 자랄 수 있음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과연 이 상황을 초월해 원하는 만큼 자랄 수 있을까. 이곳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다양한 삶과 그들이 품은 다양한 생각, 접해본 적 없는 업무들과 민간인이었다면 올 수 없었을 독특한 세계에 (잠시) 머물며 오직 이곳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싶으면서도, 어느 곳 하나 편하게 마음 기댈 수 없는 이곳이 자주 내게 불친절하다고 여겨져 나는 성장의 끝에서 번번이 망설이는 것이다. 성장을 격하게 원하는 만큼, 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무게로 나를 잡아당기는 공허함. 나는 자주 공허하다.
만약, 시간도 성정(性情, 성질과 심정. 또는 타고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내게 밤의 시간이 내어주는 성정 또한 어두움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방에서 주로 그 어두움의 시간들을 대면한다. 하루를 마치고 온 캄캄한 밤, 이른 아침 집을 나서기 전 나를 관통하는 어두움의 시간. 그 어두움의 시간 창밖을 보며 나는 자주 희망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떠올린다. 과연 이 시간을 통해 나는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시간을 지나며 내가 지니고 있던 본연의 색채가 더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과연 성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 어두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내 boq에서 함께 지내는 남자 간부들이나 결혼해 가정을 꾸린 기혼 간부들과는 공감대 형성조차 안 되는 이 부분. 이 시간들은 과연 내게 어떤 색채를 심어주고, 나를 어디로 데려가 줄까...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기간이 오고 있다.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