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
"이번 주말에 같이 축구하자."
"잘 못 들었습니다?"
상향식 일일결산 시간에 분대장들에게 던져봤는데 반응이 맘에 든다. 상상도 못 했다는 반응! 이런 거 좋아하는 나는 다들 외출 외박이 없고, 나도 별다른 계획이 없는 이번 주말 축구 약속을 잡는다. "토요일 11시. 애들 데리고 사열대로 나와. 나는 4내무 팀으로 넣어줘. 11+1로." 어쩌다의 사적인(?) 약속은 이렇게 통보가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버린다. 물론 '우리 사이에' 까지는 아니다. 오글거리기도 하고,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 성격대로라면 '쉬게 둘까? 자기들끼리 노는 게 더 즐겁지 않을까?'라고 고민했겠지만, 그렇게 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같이 놀자고 해버렸다. 군에서의 시간이 길게 느껴져도 우리의 만남은 유한하니, 잠시 배려는 접는다.
군대 축구를 나도 좋아한다. 후보생 시절 처음 여자 동기들이랑 축구를 하고 매력을 알았다. 사람들이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듣는 사람이 질색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ㅋ(여자 축구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더 재밌어했다.) 족구도 재밌었다. 역시 군인들의 공놀이 사랑에는 이유가 있다.
최근 관심사 중 하나는 소대원들과 시간을 보낼 다양한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번에는 축구에 생각이 닿았다. 재밌을 것 같다. 소대장의 공식 업무는 아니지만 중요하기도 하고, 의외로 즐거운 일중 하나는 이유야 뭐가 되었든 아이들과 업무 외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영내 px 회식, 영화(노트북+빔프로젝터) 보기, 심층상담, 족구 등등 이 있었다. 그 시간은 (다행히) 일방적이 아닌 상호 제안으로 이루어져 아이들 측에서 나에게 제안하기도 하고, 내가 아이들에게 제안하기도 한다. 심층 면담이나 영화 상영은 주말 당직 근무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가끔 외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생활관 단체 외박 때도 한번 얼굴을 비췄는데, 나쁘지 않았다. 과하게 풀어지는 애가 있을까 봐 잠시 곤란했지만(이를테면 누나라고 부르는 건 사양한다.), 부대 복귀와 동시에 제정신을 차려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중요하다. 함께 있으면, 역시 사람은 많이 봐야 정이 든다는 명확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웃을 일이 생긴다. 나는 웃음을 잃고 싶지 않다. 물론 일과시간에 매일 보지만 그때는 의무적인 부분이 강해서 ‘만남’보다는 각각 ‘존재’하는 의미가 크고, 사적인 시간을 함께 할 때 '진짜 이 사람'을 비로소 만난 느낌이 든다. '소대원들'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무리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개인을. 물론 이것은 내 의견이고, 아이들 쪽에서 어떻게 느낄지는 모르겠다. (특별히 '나'를 만나고 싶기보다는 행사의 보호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뭐 어쨌든.) 이때의 나의 기준은 '좋아서'를 전제로 하려고 노력한다. 의무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지 않도록.
결론은 이번 주말은 축구다. 즐거운 마음으로 제안했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를 4내무 팀에 넣어달라고 한 이유가 있다. 불편해서. 나는 4내무가 좀 더 불편하다. 나의 소대원들은 4내무와 5내무에서 생활 중인데 둘의 성향은 참 다르다. 분대장의 성향을 따라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성향도 그렇다. 비유를 하자면 5내무는 '돌'같고, 4내무는 '유리'같다. 5내무 애들은 혼내도 무던한 반면, 4내무 애들은 심히 상처받는 식이다. '돌'같은 우직함을 더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유리의 예민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의 뾰족함과 4내무의 뾰족함은 종종 맞물린다. 어쩌면, 나의 뾰족함에 예민한 4 내무가 뾰족함으로 반응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나를 4내무 팀에 넣어달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더 친해지려고.
주말이다. 약속 시간에 맞춰 트레이닝복을 입고 부대에 들어가니 사열대에 이미 모여있다. 이어지는 분대장의 "충성!"과 인원 보고... 그렇게 하니 쉬는 날 억지로 불러낸 것 같잖아. ㅠ 아무튼 축구가 시작되었다. 역시. 축구는 재밌다. 오랜만에 하니 더 재밌다. 근데 뭔가 살짝 이상하다. 이것은... 너희의 매너인 것인가? 공이 내게 잘도 온다. 내가 이렇게 축구를 잘했을까? 뺏는 족족 다들 뺏긴다. 공을 차면서 달려가면 상대팀은 가까이 오지 않는다. 혼자 열심히 달리다 우리 팀에게 패스하면 그때부터 전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된다.
너희의 의도는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발연기를 안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누가 봐도 중대에서 제일 잘하는 애가 맥없이 공을 뺏긴다고? 얘야... 내 눈에도 보인단다... 너의 성의를 봐서 내가 잘해서 뺏은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 와중에 매너는 딱 거기까지다. 골키퍼는 나의 골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 한 골도.
지나가며 힐끗힐끗 우리의 주말 축구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직이신 옆 중대 선배님도 보인다. 표정을 보니.. 의도치 않게 좋게 평가받게 생겼다. 좋아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뿐. 딱히 의외의 일도 아닌데. 별 수 없다. 이건 성별의 장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무튼 이 시간이 즐거우니깐. 그렇게 전후반을 모두 마치고, 결국 우리 팀이 실력으로! 이겼다. 마무리는 아이스크림으로. 이 기세를 몰아 다음에는 1소대와 한판 붙기로 한다. 그때도 11+1로.
즐거웠다. 무엇보다 모든 소대원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도 무언가를 제안하기에 앞서 너무 많은 고민은 하지 않기로 한다. 오랜만에 위병소를 나서는 마음이 기쁠 것 같다. 다들 즐거웠던 거 맞지? 부디 남은 주말도 기쁜 마음으로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