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진 Oct 16. 2024

도망자(逃亡者)의 얼굴에 관하여

휴가의 쓸모

 오늘(금요일)이 지나면 휴가를 간다. 주말 포함 3박 4일의 짧은 휴가지만, 부대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겪어보니 이 조직은 휴가에 인색하다. 휴가 일수에 인색하기보다는 휴가 여건에 인색하다. 훈련, 당직, 검열을 피하고 평시 업무 스케줄을 고려해 동료들과 휴가일을 조율하다 보면 긴 휴가는 불가능해 평소 휴가는 주말 포함 2박 3일, 3박 4일 정도에 그치고(그마저도 못 가는 달이 많다.), 1년에 한 번 여름휴가로 평일 3일을 쓸 수 있다. 주말 포함 5일이 이 조직에서 가장 길게 보낼 수 있는 연간 휴가인 것이다. 대위급 선배들은 바빠서 그 조차도 못 가는 것 같지만. 물론 상한선이 있는 연가보상비는 있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받아도 되니 나는 휴가 일수를 모두 쓰고 싶다. 가능할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이런 상황들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나 전역하기 전에는 안 바뀔 것 같다.

 모든 것이 명령인 군대에서는(식사도 명령이다. 굶을 수 없다.) 휴가도 날짜에 따른 명령이다. 따라서 사전에 기안을 올리고 지휘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퇴근과 동시에 휴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24시(밤 12시)를 기점으로 다음날로 날짜가 바뀌면 휴가가 시작된다. 나도 자대에 와서 처음에는 그렇게 했다. 다음날이 되기를 기다리다가(학수고대했다.) 일찍이 출발했지만 이동만으로 피 같은 휴가의 반나절을 날려먹은 뒤, 더는 밤 12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물론 오늘도 그럴 예정이다. 17시 일과 종료와 동시에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상향식 일일결산 및 중대 회의), 중대장님께 '내일부터' 휴가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위병소를 나서자마자, 이동시간 소요를 최소화하기 위해 콜택시를 불러 숙소로 간다.

 숙소에 도착하면 엄청나게 바빠진다. 쫓기는 기세로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캐리어에 쓸어 담고, 다시 콜택시를 불러 기차역으로 이동해 본가로 가는 가장 빠른 시간대의 ktx 티켓팅을 한다. 행여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주변은 아예 보지 않는다. 어차피 출발할 거니깐 아는 사람을 발견해 마음만 불편할 필요 없으니깐. 아는 사람 입장도 같을 테니 피차 모른척하는 것이 예의일 테니깐. 열차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이제는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열차에 올라타서 불시 호출에 대비해 핸드폰은 필수로 사수한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열차에 비치된 잡지도 읽고 멍을 때리다 보면 두 시간 반이 지나 어느덧 그리운 곳에 도착한다. 기차역에는 언니가 나와있다. 본가로 이동해 환대를 받고 가족들을 만나지만, 밤 12시 이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다. 밤 12시까지 한시도 핸드폰에서 주의를 떼지 않는다. 불시 호출에 늦지 않고 응할 방법(두 시간 이내)은 없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드디어 12시가 지났다. 마침내 진짜 휴가가 시작된다. 서두른 덕분에 1분도 낭비하지 않았다. 왠지, 일련의 과정들을 돌아보니 나 도망자 같다. 근데 도망자 같은 게 아니고 도망자 맞다. '도망자(逃亡者):법이나 규칙 따위를 어겨 쫓겨 달아나는 사람.' 딱 나다. 마음에 든다.  

 그리웠던 민간 세상의 기운을 만끽하자. 내 방이 이토록 안락했던가? 우리 집이 이렇게 넓었던가? 우리 강아지가 이렇게 예뻤던가? 심지어 평소에 쓰지도 않는 한방샴푸의 냄새에조차 그리움이 담겨있다. 진짜 집에 왔구나. 좋다. 너무 좋다. 늦잠을 자고, 엄마 밥을 먹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친구들을 만나고.. 유한한 행복을 누리던 찰나 중대장님께 전화가 온다. 친구와 카페에 있던 나는, 못 본 체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어차피 부재중 전화에 응해야 한다.) 전화를 받는다. "네 충성! 중대장님." 목소리가 너무 컸나? 잊지 말자. 이곳은 민간 세상의 카페다. 용건은 휴가 복귀날 서울역에서 중대원을 만나 함께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중대의 관심 병사가 휴가를 나갔는데(개인사로 몹시 힘들어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 복귀날 벌어질지 모를 사고(군무이탈 등)에 대비해 동반 복귀하라는 지시다. 최근 벌어진 몇 건의 근무이탈 사고로 근무이탈은 전 부대의 관심사였고, 함께 복귀할 것을 당부받은 아이의 휴가는 창장님께도 보고된 사안이라 중대장님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근데 중대장님. 사실은. 저도 딱히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민간 세상에 나와보니 더 가기 싫어지네요.라는 마음을 숨기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진심 걱정되긴 한다.) "네, 알겠습니다. 충성!" 하며 통화를 마친다. 이 와중에 친구는 나의 통화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 한다. 그.. 그래.

 이곳에 최대한 오래 머물다 한밤중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기를 쓰고 일찍 휴가 출발한 의미가 무색하게 마지막 날 빠르게 복귀하게 되었다.ㅠ 다음날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약속 장소로 중대원을 만나러 간다. 그늘진 표정.. 어떻게 하면 이 만남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끌어 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는 불쑥 말한다. "저 안 도망갑니다."... 함께 태연하게 답한다. "나도 알아. 이럴 때 한번 같이 복귀하는 거지. 커피 좋아하니? 아니면 다른 거 마시던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함께 기차에 타면서, 두 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이 아이와 함께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 답답하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지만 이 어색함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아이는 정말 피곤했는지 아니면 피곤하고 싶었는지 출발과 동시에 눈을 감고 어느 순간 진짜 잠들었고, 나는 책을 읽는다. 두 시간 반 후 목적지에 도착해 화장실에 가기 전 잠시 고민한다. 내 캐리어 잠깐 지키고 있을래? 여기 잠깐 서있을 수 있지?... 딱히 자연스럽지가 않아 나도 대놓고 말하기로 한다. 일부러 살짝 가볍게 "화장실 다녀올 거야. 근데 너... 안 도망가지? 내 캐리어 여기 두고 간다." 아이는 어이없는지 지도 웃는다. "걱정 마십시오. 어디 안 갑니다." 나도 안다. 도망가는 사람의 얼굴을 모르지만, 아이는 안 도망갈 얼굴이다. 하긴. 도망가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게 있을까. 구체적으로 아는 몇 건의 군무이탈 사고를 떠올려 봐도 모두 도망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 역시 종종 도망 다니고 있고, 지금처럼 밤 12시 이전에 휴가를 출발하는 정도의 소심한 도망 말고 크게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나 역시 절대로 도망자를 떠올릴 수 없는 얼굴일 것이다. 아무튼. 아이는 당연히 도망가지 않았다.

 함께 부대에 들어가기 전 밥이라도 함께 하고 싶지만 아이는 거절한다. 한사코 거절한다. 본심을 모르겠다. 내가 이 상황이라면 이때의 거절은 진짜 거절이고, 그럼에도 억지로 데리고 간다면 정말 싫을 것 같다. 근데 이 아이는 어떨까? 이것은 미안해서 하는 거절일까 아니면 진짜 거절일까? 질척거려줘야 할지, 두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캐묻기에는 표정이 지나치게 어둡다. 별수 없이 한 번 더 물어보고 "진짜 괜찮습니다."라고 거절당한 뒤 더는 묻지 않는다. 함께 택시를 타고 아이가 행정반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중대장님께 복귀 완료 보고를 끝으로 위병소를 나선다. '잘 지내렴.... 내일 보자.' 기운 없는 아이에게 마음으로나마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귀한 휴가의 마지막 날이 이렇게 가버렸는데 부대 비상 같은 이유의 불시 호출이었다면 짜증 났겠지만, 너와의 동반 복귀로 인해 오늘이 아깝지 않았다고. 말을 잃은 자리를 마음이 채운다.

이전 14화 '너'를 만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