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대장의 본질에 다가갈수록
당신과 나의 터널
군 생활에 깊이 감정이입하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있는 한 가볍게 지내려 했다. 잘 모르고 입대했고, 간신히 임관을 해버렸으며, 소대장 보직을 받았으니 소대원들이랑 잘 지내며 군 생활을 하되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이미 아닌 것 같지만) 의무복무 3년을 채우고 떠나리라. 그때까지 버텨야지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심각하고 싶지 않았다. 결코 결코.
깊게 마음 쓰지 말자. 배울 것만 배워서 떠나자. 어차피 나는 교육기관 성적도 별로였고(꼴찌였다.), (다행히) 소질도 전혀 없는 것 같고, (다행히) 장기 복무에 뜻도 없으니. 단지 지내다 보면 반드시 배우는 게 있을 것이며, 좋은 사람들을 알고 경험을 쌓는다면 손해는 아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며, 여자 군필은 어딜 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즉, 나는 잠시 이곳에 있을 뿐 당신들(군대)과 결코 깊게 섞이지 않겠다. 나는 오만했고, 오만한 사람들이 그렇듯 무지했다.
군인은 단순 직업을 넘어 나의 정체성이 전환되는 일임을, 근무시간만 전투복을 입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군인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어떻게 몰랐을까. 소대장의 본질은 소대원에 있음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었을까. 소대원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며, 자신의 진짜 인생 어느 한 시절을 이곳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벼울 수 있었을까.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자신이 머무는 삶에 감정 이입을 않고 머무는 일이 애초에 가능이나 할까. 나는 어떻게 현재 나와 누군가의 삶이 속한 이곳을 경험의 배경 삼자고 여길 수 있었을까.
무겁게 지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기에 이 조직은 너무 바빴고, 진지했다. 물론 내게 작은 사명감조차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들보다 내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을 뿐. 이곳에서 머물며 서서히 쌓이던 부담감과 어두움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외면하고, 지웠다. 일일 단위로 지웠다. 퇴근 후 위병소를 나서며 다음날 위병소로 들어오는 시간까지 그날의 무거움을 필사적으로 떨쳐냈다. 어느 정도는 통했다. 거기까지였다. 노력으로 털어낼 수 있던 시간은 수명이 다했다. 이곳에 살짝 발만 담그겠다고 생각하던 시간으로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소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아이들과 처음으로 면담하던 그 시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을까. 아니면 소대장 보직을 받던 순간..? 아니다. 군에 발을 들인 순간, 감당해야 할 군인으로서의 무게는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외면해 왔을 뿐.
기뻤다. 소대원이 자발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누군가의 믿음 한 조각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어서 듣게 된 상상조차 못 했던 이야기들.. 내가 심각해지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쳤던 시간 아이가 받았을 고통들... 나 뭐지? 나는 뭐였을까. 아이는 단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혼자 견디다가 더는 안되어 이런 나라도 찾아온 것이다. 아이를 구해줄 실질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급적 아무도 모르게...
소위와 이등병이 조직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충을 해결할 수 있을까? 며칠간 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아이는 재차 강도가 심해지는 고충을 호소했다. 답을 찾을 수 없어도 나서야 했다. 전임자(선임)와 의논해 결국 중대 차원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중대장님께 보고드리고 곧 그 일을 당사자들의 직속 소대장인 내 손에서 빼앗겼다. 빼앗기지 않았으면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중대 전체의 소원수리(訴願受理, 하급자가 기업이나 조직 내부의 불합리함이나 고충을 알려 이를 바로잡기를 청하면 상급자 또는 상급 부서에서 이를 받아들여 처리함. 또는 그런 일)를 진행하고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내가 할 수 있던 일은 고통을 호소했던 아이에게 진행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괴로웠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를 도와줄 수 없음을 아이는 이해하고 진행될 일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설득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죄책감에 예방약을 뿌린 건 아니었을까. 실질적인 고통(괴롭힘)은 사라졌지만, 누군가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으며, 나는 마음이 꺾였다. 죄책감... 끝없는 죄책감. 이것이 모두를 지킨 것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설령 잘했다고. 그것이 모두를 지킨 일이라고 객관적 지표까지 내세워 증명해 준다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끝 모르고 괴로웠다. 그 일이 매 순간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징계 후 멀리 있는 중대로 전출될 아이를 만나러 주말에 찾아갔다. 징계 중에 있는 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찾아갔던 나의 그 마음은 뭐였을까. 비록 네가 잘못했지만 그럼에도 너를 다른 곳으로 보내게 된 나의 미안함을 희석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아이가 그렇게 된 깊은 원인까지 돌아봐주지 못한 나의 무력함이 빚은 죄책감에 나는 그 아이를 만나고 싶었을까? 어쩌면 나는 이상(理想)을 꿈꾼 건 아닐까. 모든 행동에는 그 원인이 있을 거라고. 그 아이의 성장환경부터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오늘에 이르게 했을 어떤 상처까지 다가가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지 못한 채, 표면적인 일로 판단하고 처리해 떠나보내는 미안함이 나 스스로 감당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훈련소에서 기록했을 그의 성장과정에 담겨있던 무거운 이야기들... 그렇게 자라왔고, 중대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날 그 아이와 잠시나마 함께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상처조차 제대로 감당 못하고 커버린 내가 누군가를 온전히 품고 마음속의 깊고 깊은 상처부터 치료해 나간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짐작할 수 없는, 크기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일들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결국 그것이 최선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 괴로웠다.
남겨진 아이를 보는 일도 힘들다. 이 아이의 남은 군 생활이 다시 힘들어지지 않을지. 행여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건 아닐지. 내가 언제까지 붙어서 이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남겨진 아이에게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을까. 그리고 이번 일을 직, 간접적으로 겪고 지켜본 소대원들이 더는 나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건 아닐까. 끝도 없이 괴로웠다.
소대장의 정체성과 이 직책의 본질을 소대원들을 통해 아프게 깨닫는다. 그럼에도 지금은 아이들을 보는 일조차 버겁다. 이 모든 감정을 혼자 처리하고 나는 그저 멀쩡한 얼굴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 서야 한다. 마음은 오직 혼자 지고 가야 할 혼자의 몫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직책의 무게를 외면하던 대가는 아프게 찾아온다.
이제 두렵다. 면담도 싫고, 소대원도 부담되고 다 싫다. 면담 간에 또 어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들려올지, 어떤 것을 보게 될지 듣기 전에 보기 전에 두렵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일도 피하고 싶다. 행여나 나를 향한 반감이나 비난이 담겨있을까 봐. 그리고 나는 눈빛으로 상대에게 전할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다. 어쩌면 내 머릿속으로 빚어냈을지 모를 이 모든 부정의 기운이 나의 마음을 꺾었고, 힘이 빠진 마음은 그냥 어두움에 지고 싶다.
하루를 보내면 그날 쌓인 마음의 무게를 털고 다음날을 맞이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버텨왔던 시간들은 이제 끝났다. 채 해결하지 못한 이 마음을 안고,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이 마음을 안고 곧 시작되는 길고 긴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 지금은 한 가지만 알겠다. 일단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뿐. 집에 가자... 일단 가자.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빠르게 집에 가자... 멀리서 주임원사님과 행보관님들이 오고 계신다. 이 기분으로는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피하기엔 늦었다. 평생 군에 헌신하신 분들이 나를 발견하고 경례를 하신다. 다시 괴롭다. 이곳에 계신 한 분 한 분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내게 주어진 '소대장' 직책의 무게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결코 군 생활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니, 이 조직이 지닌 깊은 의미까지 이해할 수 없어도, 이곳에 진지하게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알았더라면.... 다시 마음이 힘들어진다. 죄송하고 민망한 마음으로 경례에 답한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제 진지해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