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 여 군무원 간담회
분기 한번 부대 내 여군, 여 군무원 간담회가 있는 날이다. 근처 부서 여자 부사관들과 만나 함께 간담회가 있는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이동 간에 간담회 예상 안건과 더불어 특정 인물에 관한 개인적인 고충들이 언급된다. "소대장님보다 직책이 낮으니 소대장님께는 못 그렇겠지만.."이라는 서두에서 나는 구체적인 한 인물을 떠올린다.
얼마나 되었을까. 휴가 복귀를 하던 날이었다. 부대관리 분야의 불시 검열이 다음날 계획되었니 즉시 부대에 들어와 미흡 자료(소대원 상담 일지 등)를 작성하라는 선임의 전화가 있었다. 숙소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갈까 했지만 선임은 화남을 억누르는 목소리였고, 옆에는 중대장님도 계신듯해 일단 부대로 가기로 했다. 현재 내 위치를 알고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부대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터였다. 잠시 멈칫했지만 휴가 때의 옷차림으로(그날따라 재킷, 구두, 핸드백, 귀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부대로 들어갔다. 위병소 앞에서 택시를 내려 중대로 이동하던 중 평소보다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덧 이곳에 익숙한 존재가 된 나는, 순간 군인이 아닌 여자의 외형을 하고 온 사실이 실감 났다. 서둘러 중대로 이동하던 중 누군가를 마주쳤다. "소대장님 오늘 너무 예쁘십니다." 산뜻하지 않은 말투에 산뜻하지 않은 눈빛의 누군가와 마주친 뒤, 차림새가 더욱 신경 쓰였지만 빠르게 일을 끝내야 했다. (늦더라도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하고 잠시 생각하긴 했다.) 밀린 면담 일지들을 작성하고, 검열 간 중점적으로 다뤄질 미흡 자료들을 마무리 지으며 급한 불을 끈 뒤 집으로 돌아갔다.
검열은 잘 넘어갔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한 간부의 불편함은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마주칠 때면 사복을 입으니 달라 보이고 예쁘셨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들(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 말이었던가.)과 (최대한 순화해 표현을 한다면) 산뜻하지 않은 눈빛이 불편했다. 내심 경계하던 그의 불쾌함은 어느 날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잠깐 고민했다. 직접적으로 이 불쾌함을 질렀을 때 잃을 것과, 넘겼을 때의 빡침 중 어느 쪽이 나을지. 답은 명확했다. 할 말은 기필코 해야 하는 나는 나설 때가 되었음을 알았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경고했다. 그의 태도의 바르지 못함과 무례함에 관하여.(물론 단순 눈빛과 말투만 보고 지적하지는 않는다. 허용할 수 있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기에 무례함을 굳이 이곳에 옮기지 않을 뿐.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불쾌해지고 싶지 않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경고했던 것이 실수였던가. 편견일지 모르지만 그러한 유형을 가진 개별 인물의 행동 양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발뺌, 분노, 무례함으로 이루어진 적반하장.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니, 빗나갔다. 예상보다 더했으니깐. 그는 빠른 순간 낯빛을 바꾸며 격하게 자신을 변호한 뒤 무례하게 사라졌고, 그 후 마주치면 인사도 하지 않고 멀리서부터 나를 피하거나 모른 척 다니고 있다.
어느 쪽을 참는 편이 내게 나았을까...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다. 나는 결국 그 사람을 참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백번 양보해 나의 이성이 참았다 해도, 내 안 깊은 곳에 있는 분노는 결국 폭발했을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동료들에게 이 순간 오르내리는 사람은 정확히 그였다. 순간 멈칫했다. 이 주제에 가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은 아니다. 여러 여자 간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로도, 그가 공론화되는 것은 수일 내의 일일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단지 나의 입지를 생각한다. 내가 이 주제에 선뜻 끼어들지 않는 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의 입지. 장교의 막내 계급인 나는 부대에 여자 선배님을 한 분 모시고 있다. 운이 좋게도 다양한 유형의 여자 군인들 중 인품도 실력도 훌륭한 분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 통찰력이 좋으신 창장님은 나에게 그 선배는 내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롤 모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니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 선배에게는 그의 이야기를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여자 부사관들은 어떠한가. 개인대 개인이 아닌 직책을 놓고 봤을 때 이 이야기를 공론화하지 않는 편이 낫다. 지내본 바 그들과의 관계는 경우에 따라 미묘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계급의 차이에서 기인한 부분도 있겠지만, 사람 성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 중에는 상급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도 있지만, 은연중 견제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물론 의식적으로라도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는 않는다. 일말의 거리낌을 의식하면, 어느덧 그것의 몸집이 커져 나를 찌를 수 있으므로. 설령 사람 대 사람의 결이 맞는다 해도 이 조직의 복잡함에 휩쓸리면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으므로 나는 나서지 않기를 택한다. 그들의 의견에 공감을 표하며, 나의 일화를 꺼내기에는 위험부담이 따른다. 어떤 마음일까. 직책에 따른 권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권위를 침해하는 일이 될까 봐. (어느 간부가 소대장님한테는 인사도 안 하고 다닌다더라 같은 뒷말. 그것은 물론 그의 문제지만, 나의 문제로 이어질 것에 대한 우려. 예를 들면 '오죽했으면'으로 이어지는 말들. 오르내리는 말들이란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가끔 그런 거니깐.)
마지막으로는 여자 군무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연령이 높은 편이며 성품이 따뜻하고 평소에는 나와 마주칠 일이 많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다수(多數)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필히 말도 많으니 조심할수록 좋다. 결국 그 안건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삼킨다.
그 안건을 생각 속에서 결론지은 뒤 다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창장님이 주관하시는 간담회에 참석한다. 아직 미숙하고 군 생활의 경험치도 낮은 나는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다. 좀 전의 그 일은 차치하고 다른 안건 또한 섣불리 꺼내기 어렵다. 이것이 내 상황에서 해도 적당한 발언일까. 내가 이곳에서 겪는 고민들. 간부로써 겪는 고민들과 여자로서 겪는 고민들. 그것을 이곳에서 안건화하라고 만들어준 자리이지만 과연 공개된 장소에서 토로하는 일이 옳은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면 탄약고 현장 지역에 여자 편의시설이 멀리 있는 건에 관해. 그것이 먼 곳에 있다고 토로하는 일이, 다른 여자 간부들은 그동안 그렇게 지내왔는데 여자 소대장이 오더니 까다롭게 군다고 비칠까 봐 나는 과도한 검열을 거듭하다가 아무 말도 않기를 택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나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하며 오히려 나의 역할을 한정한다. 대두되는 안건들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교육적인 내용(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성 관련 사건사고에 대한 교육, 모성보호법 및 보건휴가 등)을 경청하며 습득하는 것으로 나의 역할을 한정 짓고, 개인적인 나의 고민들은 따로 여자 선배를 찾아가 의논하기로 한다. 나에게도 어딘가 말할 수 있는 창구(窓口 )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무례했던 간부의 일도 다시 생각해 본다. 인사조차 안 하는 건 본인의 그릇이니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행여나 그게 이 조직의 룰을 무시하는 행위라 해도 굳이 내가 공론화해야 할까? 나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이제 거슬리는 행동은 않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나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소수 성별을 위한 간담회의 취지는 좋다. 하지만 실질적인 고충이 누구도 다치지 않고 얼마나 잘 처리될 수 있을까. 모두 이 자리에 어떤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을까.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결국 몸만 그곳에 남겨두고 간담회장을 벗어난 나는 끝으로 한 마디씩 하라는 창장님의 멘트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 빠르게 무난한 말을 짜낸다. 이 자리의 유용함과 마음 써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물론 거짓은 아니지만 중요한 말 또한 아니다.
하나는 알겠다. 머리는 복잡할지언정 이 일이 탄약고 지역의 일과보다는 몸이 편하다는 사실을.
간담회를 마친 뒤 다 같이 외부로 밥을 먹으러 가기로 한다. 간담회의 복잡한 속 사정을 모르는 선배들은 일과도 빠지고 외부에 나가서 식사까지 하고 왔다고 나를 부러워할 것이다.
선배님들 오늘 제 몫까지 고생하셨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냥 얻어지는 밥은 없답니다... 그리고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오늘은 조금 궁금해집니다. 이 조직의 다수(多數)로 지내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