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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Sep 30. 2024

보통의 어느 주말

나의 총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한번 상대와의 관계가 형성되면, 개인적으로는 어떤 기준이 되는 나만의 선(線)을 감지한다. 내가 이 선을 넘는 이상의 모습은 가급적 너에게 보이지 않겠다는 선(線). 구체적으로 본다면 분노, 짜증, 비난, 그리고 정색 등의 감정에 국한되는 선(線) 일 것이다. 기쁘고 즐겁고 잘해주는 일은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상관없으니깐. 하지만 한번 분노 쪽 감정의 물꼬가 트고 선을 넘으면,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처음보다 쉽고 그러다 보면 빈번해질 수 있고 결국에는 관계가 어그러질 수 있어서. 따져보면 그 선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당신의 그런 모습 또한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지금 내가 관계의 '선(線)'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소대원들을 상대로 가늠하던 분노의 상한선을 넘은듯한 마음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고 있다. 

 곧 상급부대의 검열이 있을 예정이다. 이번 검열 중점은 초급간부 전투지휘능력 검열. 대상은 무작위 선정. '무작위'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예감했다. 무작위로 뽑히기 딱 좋은 부대 유일 여군 소대장인 나. 심지어 가장 막내 초임 간부. (얼마 전 교관 연구강의도 무작위로 뽑혀서 내가 했다. 부대 전체에서 3등 했다.) 몇몇이 뽑히던 그 무작위에 나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기에 그날로 소대원들과 연습을 시작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연습은 재미있지 않다. 집총(총을 쥐거나 지님) 동작들을 연습하고, 대형을 갖춰 이동하고 자세를 절도 있게 잡는 일련의 연습 과정들을 반복하다 보면 지휘하는 사람도 따르는 사람도 지치기 시작한다. 평일에는 일과 대신 연습 시간이 주어지기도 해서 그런대로 괜찮지만 틈틈이 진행되는 연습으로는 부족해, 주말 연습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소대의 결과가 형편없어 부대에 누를 끼치면 안 되기에. 

 나 개인의 입장을 말하자면 이 상황이 '몹시' 달갑지 않다. 부대 들어오는 길에 선임들을 마주쳤는데, 나랑 있으니 우연히도 본인들은 무작위를 피하게 되어서 고맙다며 놀러 나갔다... 

 휴일에 전투복을 입고 부대에 들어와 쉬고 있는 소대원들을 전투복으로 집합시키며 느꼈다. 무언(無言)의 부정의 기운이 얼마나 큰 소리를 내는지. 나도 싫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온몸으로 저항하는 분위기를 잘 알고 있지만, 나의 한계는 그 상황에서 아이들을 매끄럽게 끌고 가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도 싫지만 힘내자'류의 멘트로 공감을 얹어 품고 이끌어가지 못하면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기 싫으면서,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난처함이 엉킨 상황. 이 타이밍에서는 그동안 아슬아슬 숨기고 자제했던 내 성격의 모난 부분이 딱 나온다. 나는 결국 감정이 없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변모한다. 사적인 말들이나 스몰토크들은 일체 배제한 채, 연습 관련된 말만 하며 무표정으로 연습을 진행하는 사람으로. 비유를 하자면 훈련소의 조교들처럼. 물론 fm 조교들보다 실력은 월등히 떨어지고 어설프지만 그 시간 그런 자아를 입고 연습을 진행한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면서 미리 방어벽을 치는 것이다. 어떠한 불만의 기운도 감히 나에게 와닿지 않도록. 다들 기분이 안 좋겠지만, 가장 기분이 최악인 사람은 그 시간 위악(僞惡)을 떨던 나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것을 위악이라 할 수 있을까. 모난 성격으로 선택할 수 있던 최선이었을 뿐. 

  이런 생각도 따라온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너희가 만약 여자 소대장의 소대원이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이런 검열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불편함. 미안함 쪽으로 분류되는 감정일 것이다.(물론 남자 간부들도 뽑힌다. 확률이 100%가 아닐 뿐)

 거기서 끝이 아니다. 쉬는 날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함께 연습을 마친 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아이들과 헤어지며 나의 모난 성격은 정점을 찍는다. "수고했다. 애썼다." 결코 어려운 말이 아니다. 틀림없는 나의 진심이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이다. 이제껏 굳은 표정으로 까칠하게 나오다가 갑자기 수고했다고 하면 말의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내면에 공존하는 '까칠함'과 '고생했다'와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메울 자신이 없어서. 그럼에도 어색한 멘트로 수고했다고 말하면 그 진심이 왜곡되지 않을까? 아니면 아이들도 이미 마음이 상해있어 내 말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다 보면 '관두자'라는 모난 결론에 이르게 되고, 결국 '수고했다'를 삼키며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일관성 있게 모난 컨셉으로 연습을 마무리한 뒤 깔끔하게 잊어버린다면 차라리 낫다. 그럴 그릇도 못 되는 나는, 쿨하지 못하게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여러 차례 복기하며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다며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것이 나의 총체적인 문제이다. 

 아무튼 연습이 끝났으니 일단 집에 가자. 전투복부터 좀 갈아입고... 꿀꿀하니 지난번 얼핏 봤던 그 옷... 그거 괜찮았는데 다시 보러 갈까? 가서 한번 입어 볼까? 

 생각하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나는 분명 이 도시에 아는 전혀 사람이 없었고, 지금도 부대 사람만 알고 있다. 간부가 100명도 채 안 되는 부대니 엄청 큰 부대도 아니고, 이 도시는 작은 도시가 아니다. 근데 의문이다. 이 도시에는 왜 우리 부대 사람들 밖에 없는지. 어딜 가나 부대 사람들을 마주친다. 어쩌면 다들 동선이 거기서 거기인지. 얼마 전에는 옆 중대 선배랑 밥을 한번 먹었는데, 출근했더니 저 멀리 경비중대 아이들까지 모두 알고 있어서 놀랐다. 외박 나온 아이들에게 목격되었다고 한다. 자신들의 관점을 얹은 시각으로. 

 아무튼 가서 옷을 입어봤는데 피팅룸 바깥에서 누군가 마주친다고 생각하니 가기 싫어진다. 옷은 일단 분위기가 어떤지 혼자 봐야 하는데. 그리고 아까 선임들은 그쪽으로 간 거 아닐까? 그럼 더 신경 쓰인다. 옷 고르면서까지 선임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관두고 마트나 갈까? 근데 운영과장님 거기 다니시는 것 같던데. 행보관님 집도 그쪽인데. 나만 그런가? 물건 살 때 아는 사람 만나면 민망한 거. 이것저것 편하게 구경하고 싶은데 아는 사람 있으면 불편해지는 건 내가 예민한 건가? 일상의 장소에서 예상 못 한 타이밍에 부대 사람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것을 신경 쓰며 지내는 것. 이 또한 나의 총체적인 문제겠지.

 그냥 마트도, 옷도 다 관두고 서점에 가자. 그게 낫겠다. 나의 멘토 존 맥스웰 신작 나왔던데 그것도 읽고, 데일리 카네기 인간관계론도 봐야지. 요즘 자꾸 속 썩이는 애들이 있어서 신경 쓰이는데 그거 보면서 방법을 연구해 봐야지. 왜 다들 나를 힘들게 하는지... 얼마 전 본 예쁜 카페 가서 책 좀 읽다 보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이번 주말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가버리네. 내일은 검열 오기 전에 탄약고 제초작업도 하고, 연습도 마지막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고. 저녁엔 당직.... 점점 찌들어 가고 있다... 

근데. 나 혹시 너무 내 중심적인 거 아닌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참아주고, 나와 우연히 마주치고 싶지 않고, 나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조차 안 하는 이 오만함은 뭐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총체적인 문제 아닐까? 

휴.. 내일은 진짜로... 아이들한테 좀 더 살갑게 다가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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