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행복이가 다니는 학교를 찾았다. 그 특권은 행복이가 학교에서 받고 있는 특별 대우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특별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특권은 행복이가 무언가를 잘해서 받은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행복이가 무언가를 못해서 받게 된 배려의 산물이었다.
행복이는 여느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 그 다름은 때때로 학교에서 특별한 배려로 이어진다. 그 배려는 수업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일 때도 있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 쉽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참 고마운 일이겠지만, 부모로서 나는 그 배려가 결코 기쁘지 않다. 그것은 내가 행복이를 바라보며 꿈꾸던 ‘특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특별함은 이런 것이 아니다. 나는 행복이가 자신의 노력으로 작은 성공을 거두며 자부심을 느끼기를 바란다.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서고, 실수해도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의 이 특별 대우는 그런 꿈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행복이가 혼자서 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한, 도움과 배려의 체계다.
오늘 학교에 가며 나는 마음속으로 행복이에게 묻고 있었다. ‘행복아, 너는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싶니?’ 아마 행복이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빠, 나는 그냥 평범하고 싶어.’
행복이의 대답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우리는 보통 특별해지길 바라며 살아가지만, 행복이는 오히려 평범해지기를 꿈꾸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지금 받고 있는 특별 대우는 특권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의 평범함마저 빼앗고 있었다. 행복이가 학교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졌지만, 부모로서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선물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교실 창밗에서 행복이를 보며 다짐했다. 특권이 아니라, 진정한 자립을 위한 기회를 행복이에게 만들어주겠다고. 특별 대우를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행복이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평범함을 만들어주겠다고. 행복이가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까지, 나는 이 아이의 곁에 있을 것이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평범함 속에서 진짜 행복을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이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