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가 성관계 자체를 경멸하는 성엄숙주의자이어서도 아니고, 사람간의 사랑에 이를 가는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만약 향수업계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테마의 향수 광고나 마케팅을 모두 철회하고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세요의 컨셉으로 모든 광고 영상이 자연 풍경만을 보여준다면 나는 그것 역시 처음에는 어리둥절할지언정 나중에는 고루하고 재미없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컨셉의 향수 마케팅이 나와도 내 눈쌀을 늘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위악을 부린답시고 못된 말을 하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결인데, 사람들은 다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저속한 욕구와 언행을 드러내는 것이 솔직함이다, 라고 믿는 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광고다.
왜 저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성욕과 폭력에 집착해서 그것만이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폭력, 살인, 고어, 기타 등등! 매우 매력적인 소재라는 것은 인정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지금도 잘 팔리는 것을 보면 쉬이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책이 1985년에 나왔고 영화 역시 2006년에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루하다는 뜻이다. 마치 시간이 지날 수록 다양한 장기자랑(?)과 어떻게 창의적으로 사람이 해체될 수 있는지만을 보여주기로 작정해서 지루해진 몇몇 고어 영화처럼, 소재만으로 매력적이기는 어렵고 그 매력적인 소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해보자. 과연 '나'라는 인간의 삶에서 성욕과 폭력욕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욕구 중 가장 강렬한 것을(생물학적으로 필수적인 배설욕, 식욕, 수면욕은 뺐다) 뽑자면 그것은 성욕도, 폭력에 대한 욕구도 아니고, 친교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강도로 이 욕구를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친구, 가족, 연인, 직장 동료, 기타 등등 타인과 교류를 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꾸리고 사는 동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친교관계를 생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생존에 유리하다. 혼자 뭔가를 다 하려고 하기보단 서로서로 빈틈을 메워주고 함께 뭔가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못하는 경우 어서 가서 친교관계를 맺으라는 신호로 우리는 실제로 고통을 느낀다. 나는 여기서 사랑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타인과 편하게 소통하고 함께 뭔가 하고 싶은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사람이 없으면 다른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에게도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낀다. 사무실에 로봇 청소기를 샀더니 사람들이 어느 순간 로봇 청소기에게 친근함을 느끼고 쓰레기를 모아뒀다 지나갈때 줘서, 로봇 청소기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를 금지한 일화를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비단 가장 강렬한 욕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토론해보지 않아도, 성욕과 폭력 외에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감정이나 욕구나 열망은 얼마든지 있다. 미래는 현재보다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열망, 관심을 받고 싶은 욕망, 쉬고 싶다는 욕망, 정의감, 좋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노스탤지어) 등 인간이 느끼는, 원하는 것들은 정말 많다. 혹자는 성욕과 폭력은 조금 더 자본주의 사회에서 포장한 후 팔기 쉽지 않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향수 업계에서 드높은 산에 도전하는 스포츠맨,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활약한 대배우들, 잠시 휴양지로 떠난 듯한 기분, 대대손손 부유 가문 등 여러 이미지를 광고 카피에 쓰는 것을 보면 굳이 성욕과 폭력만이 더 잘 팔린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성욕과 폭력이 가장 순수하고 원시적인 에너지라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어딘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둘 모두 생존과는 생각보다 동떨어져 있다. 앞서 말했지만 배고프고, 화장실에 가고 싶고, 졸려서 쉬고 싶다는 에너지가 가장 순수하고 원시적이다. 이 욕구들은 이행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도 어젯밤에 3시간정도밖에 잠을 못 자서 졸려 죽을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늘 인간의 원초적 욕구, 본능을 향으로 표현한다면서 누군가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집어먹고, 아무데서나 오물을 지리고, 길가다 쓰러져 자는 것들은 표현하지 않는 세태에 조금 냉소적 비웃음을 보내곤 한다.
설령 폭력과 성욕이 그러한 중요한 에너지라고 쳐도, 왜 그것을 굳이 드러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위선이다, 나는 날카롭게 인간의 본질을 고찰한다, 이런 말에 질렸다. 성악설 운운하는 사람들은 늘 순자가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악하다"는 부분만 기억하고 직후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부분은 까먹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 충동적인 행동을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그러지 말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친절하라고 교육을 받고 사회에 사는 것이다. 나는 이런 위악이 진정한 선이다, 폭력이 인간의 본질이다 운운하던 지인이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어린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 얼굴을 찌푸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대체 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린 아기는 아직 교육이 덜 된 상태라 정말로 본능적인 행동만을 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아기의 울음소리는 어쩔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추악하고 위선적인" 예의범절의 영향 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순수하고 강렬한 수단 아닌가.
그냥 당신이 눈치보기 싫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욕도 먹기 싫은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뭐라고 하면 바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표현의 자유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까임방지권"과는 다른 말이다. 아무도 당신의 저속한 생각과 언행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제발 좀 격식을 차릴 때는 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