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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Jul 13. 2022

Ep 2. 일단 해보는 게 제일 어려운 거니까

용기는 부재중입니다.

무언가를 계획하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어진 일이나 과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계획을 행동에 옮기고, 생각한 대로 현실화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을 떠올려보자. 여름방학이 다가올 즈음, 담임선생님께서는 빈 동그라미 시간표를 주시고 방학 때 본인이 목표하는 것과 배우고 싶은 것 등을 담아 시간 계획표를 작성하라고 하신다. 꽤나 많은 고민 끝에 시간 계획표를 작성하고 제출하지만, 시간을 지키는 건 둘째치고 하려고 했던 걸 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그만큼 무언가를 한다는 것, 즉 시작하고 유지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뭘까? 지금은 고인이 된 버질 아블로처럼 1년 중 360일을 출장에 할애할 만큼 바쁘고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능력이 부족해서 못한다고 하기엔 확고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없는 능력을 배양해서라도 자신의 로드맵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목표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오기라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이유를 용기의 부재에서 찾는다. 생사가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만 용기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조별과제 발표시간이 다가오면 교수님과 수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것이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다. 머리를 밀고 훈련소에 입소할 때도, 하다 못해 처음 접하는 음식의 첫 숟가락이 입안으로 향할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      


이처럼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또는 해본다는 건 그동안의 관성을 깨는 행위임과 동시에 실패의 리스크를 안고 있기 때문에 꽤나 큰 용기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나의 실패'에서 비롯되는 '남의 시선'에 더욱 예민해진 세대이기에 그 리스크는 배가 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에게 필요한 용기는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세트장으로 구성된 세계의 문을 열고 새로운 빛을 보는 데 필요한 용기만큼은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알을 깨어 본 경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을 소개하려 한다.     


때는 2016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고 우리 학교는 한 달에 한 번씩 주말 동안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귀가일을 보내고 학교로 복귀하던 날이었다. 우연히 전단지를 통해 홈플러스 세종점에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플리마켓 행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1학기 기말고사가 마무리되었고 방학까지 2주가량 남은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플리마켓 행사 참여를 지원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 6명이 모여 1주일 동안 밤을 새우며 학교에 있는 레이저 커팅기 등의 시설을 이용하여 제품을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비록 적은 수익금이 모이더라도 수익금 전액을 치료비 지원이 필요한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자는 취지였다.


행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처음과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방학 전까지의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 경험 삼아 참여했던 행사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가 1주일 간 했던 활동이 그 어떤 것보다 존엄하고 소중한 일로 다가왔다. 그래서 2학기부터 이와 관련된 활동으로 동아리를 결성하기로 다짐했다.


고등학생이 공부도 아닌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조금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나 또한 의식하긴 했지만 그보다 컸던 응원의 목소리에 힘입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곳에 우리 동아리와 제품을 소개하는 자료를 보내고 공유하며 홍보를 진행했다. 또한, 제품의 품질을 향상하기 위해 많은 도안과 샘플을 그려가며 2학기에는 4가지의 주력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기린 휴대폰 거치대, 어린이용 퍼즐, 천연가죽 이어폰 홀더, 고슴도치 연필꽂이

처음으로 디자인한 4가지 제품들을 홍보, 판매한 결과, 2016년 11월 동아리 활동의 첫 결실로 대전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기적의 새싹 캠페인에 100만 원을 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TJB와 연락이 닿아 '생방송 투데이' 방송에 출연하였고 지역 주민들에게 동아리의 취지와 활동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2017년, 우리의 이야기를 본 여러 학교들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와 같은 취지의 목적을 가진 동아리를 운영하고 싶다고. 당장 밀려있던 주문 건도 해결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학업에 치여 살던 와중에 받은 연락이라 당황스러웠다. 당시에는 워낙 여유가 없어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5월에 Zoom 화상 회의를 열었다. 여러 학교들이 참석했는데, 회의 이후 우리를 비롯한 8개 학교가 전국학생사회환원동아리연합체를 구성했다. 우리와 같은 시설을 가진 학교들은 제품 생산과 판매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사회 환원을 계획한 학교들은 우리와 온라인 캠페인 등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이처럼 활동이 확대되면서 우리의 플리마켓에서 시작된 작은 활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우리는 매 학기마다 100만 원의 수익금을 다양한 곳에 기부할 수 있었다.


2018년 여름이었다. 쉬는 시간에 이메일 알림이 울렸다. 내용을 확인하고 처음에는 스팸 메일인 줄 알았다. 초록개구리 출판사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이면 입시가 한창일 때다. 입시라는 틀에 갇혀있기보다는 지난 3년 간의 결실을 맺기 위해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할 때인데, 나는 출판의 기회를 버릴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원고를 작성하기엔 큰 무리가 있으므로 전문 작가님과 인터뷰를 진행해 그 내용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펴내기로 했다. 이후, 우리의 이야기는 "열일곱의 나눔 공작소(초록개구리, 2018)"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만약 플리마켓에 나갈 용기가 없었더라면, 학업과 동아리 활동을 병행할 용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런 의미 있는 활동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만든 동아리일 뿐인데 많은 어른들이, 언론들이, 심지어는 또래의 학생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동참해줬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우리의 좋은 취지와 더불어 용기의 진정성이 닿은 게 아닐까?


이처럼 용기는 부재하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로 큰 힘을 갖는다. 서 [데미안]과 [트루먼 쇼]를 이야기하며 알을 깨기 위해 필요한 용기의 크기에 대해 논한 바 있다. 마치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할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해본다면 문을 열겠다는 결심 하나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용기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나 또한 글을 쓰며 스스로 되새겨본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면 다시 전화를 걸면 그만인 것처럼, 부재중인 용기를 되찾아오는 것도 한순간의 결심과 행동일 뿐이라고.


* Photograph @henry_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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