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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Apr 03. 2023

보라색 다이어리

바쁨과 불안을 나타내는 물건

  

“이렇게 바쁘게 살아 본 적 있으세요?”


최근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 없이 하루를 보낸다. 결국 6킬로그램의 살이 빠졌고,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던 동료가 질문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항상 이렇게 바빴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걷고 싶었던 대학생.     

20대 때 나는 벚꽃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 요새는 3월 말쯤 개화하지만, 그 당시 벚꽃이 핀다는 건 곧 중간고사라는 뜻. 시험은 곧 대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느냐와 연관되었기에 벚꽃 거리를 걷는 행위는 사치였다.      

수업 내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필기한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있다가 아르바이트하러 간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또 도서관에 들린다. 당시 에너지 음료인 핫*스를 마시고 밤을 새워 공부하고, 다음 날 또 잠을 자지 않는다. 과 수석만이 등록금 전액 면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 학기를 전부 A+(학점 4.5)로 마무리했다. 좋은 성적에도 전과를 꿈꾸지 ‘못한’ 이유는 수석 장학금 때문이다. 당시 ‘교사’가 제일 안정적이고 무난한 직업이었는데, 사범대로 전과하라는 권유에도 ‘누구나 가는 길로 가지 않겠다.’라며 패기 부리는 척했다. 전과하면 수석을 못할까 두려웠다. 수석을 못하면, 면제도 못 받고, 그럼, 학교도 못 다닐 테니까.      


다이어리 쓰는 걸 좋아했다.      

(**다이어리 사진 추가 예정)


당시 다이어리에는 한 달 동안 기억할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과제 기간, 팀 모임 시간, ppt 만들기, 실험 날짜. 게다가 기독교 동아리를 누구보다 열심히 하기에 순모임, 전도 모임, 순장 모임, 예배.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모임 중 어떤 것도 빠지지 않는다. 까먹지 않으려 써 두고, 쓰인 대로 ‘미친 스케줄’을 소화한다. 내 건강은 그 당시 나빠졌다고 확신할 정도로 바쁘게,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 과로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득 채워서” 하루를 보냈다.


공부할 때도 스톱워치를 누르고 얼마나 공부했는지 기록한다.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은 스톱워치가 멈춰져 있다. 마무리로 기록된 시간이 늘어나게끔 목표를 세운다. 과제들은 미리 해두려는 편이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를 받기에 ‘조기 착수’해서 마감 전 한 번 더 검수하고 제출한다. 시험 기간 내 계획대로 모두 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 공부 계획을 지키려다 보니 아르바이트하고 도서관에서 밤을 새운 날이 꽤 많았다.      


지켜진 계획에는 형광펜으로 덧칠하거나 펜으로 체크한다. 당시 해낸 일이 많을수록 뿌듯했을까. 당시는 계획을 지켰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 지킬 계획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계획이 틀어져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바뀐 계획을 다른 할 일로 채우는 시간도 좋았다. 대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불안하다. ‘여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바뀌는 건 없다. 등록금이 더 이상 나를 옥죄지 않을 때도, 오히려 시험 있는 세상이 익숙한 사람처럼 텅 비어있는 시간이 불안하다.       





제주에 와서 정말 즉흥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세상에서 제일 즉흥적인 상사 밑에서 일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던 말이 “여유를 가져라. 누리면서 살아라.”였다.


타인에게 들은 여유라는 가치를 나에게 들려준다.

‘휴식해도 괜찮다. 여유로움은 값진 시간이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가치도 나에게 맞으라는 법은 없다. 나에게 알맞은 처방전이 필요하다.


여유는 하루 이틀 정도만. 아니 몇 시간 정도만.

여유가 길어지면 스트레스니, ‘잠깐의 여유’라도 가져보자.      


잠깐의 여유가 뭘까. 나는 어릴 때 하지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문구점. 길을 걷다 만나면 꼭 들려보는 곳. 조용할수록, 다양한 캐릭터와 파스텔 톤의 색감을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곳. 문구점에 가면 아기자기함에 빠져 당장 필요하지 않은 볼펜과 공책을 구매한다. 새로 산 필기구로 깨끗한 공책 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끄적거린다. 문구점 구매율 1위는 볼펜, 얼마 쓰지 않고 또 사는 물품은 다이어리이다.


잠깐의 여유를 사려고 간 문구점에서 내 바쁨을 나타내주는 물건을 구매하는 셈이다. 뭔가 해야 한다는 불안감, 여유는 가난한 내 인생에 있을 수 없다는 압박감을 쓰는 다이어리를 산다.      


그런데 최근에는 구매한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


엄청 바쁜데, 기억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전히 불안한데... 그저 귀찮고, 힘들고, 의미가 없다. 왜 다이어리를 쓰지 않을까 생각해 봤는데 ‘기록’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 어디든 기록으로 의미를 남기고 싶지 않아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     


아, 그래. ‘열심히 살기’ 싫구나.

기록할 만한 ‘특별한 일정’을 만들고 싶지 않구나.

바쁜 삶에 의미를 두고 싶지 않구나.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하는구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가.

사는 것조차 미안해졌다가.

이렇게 안 살면 어쩔 건데 싶다가.

복잡한 마음에 “바빠서 다행”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려 내 마음에 말해준다.

    

아침에 눈이 떠지면, 하루를 살아야 하잖아.
바쁘게 살아서 다행이야.
흐르는 시간과 삶을 기록하지 않아도 바쁨이 가능해서 다행이야.
의미가 없으면 어때.
열심히 사는 모습이면 어때.
뭐든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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