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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Oct 31. 2023

가을 단상

따뜻하지만 담담하게, 물 흐르듯

결국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입가가 터져서 찢어졌고 감기몸살도 동반됐다. 늘 두통감기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번엔 목이 간질거리더니 목소리까지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픈 것을 감지한 순간 올 것이 왔구나 싶으면서도 머릿속은 이내 남아 있는 일정들을 일렬로 세우고 있다. 주 2회 이상 시월의 마지막 날 있을 공연 연습과 낭독공연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더구나 목감기가 심해진다면.......


편의점에서 감기약을 사 먹고 망설임없이 이튿날 바로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에 맞춰 외출을 했다. 빠른 회복을 위해 링거를 맞을 작정이었다. 올해 초 무등산행을 하기 전에 맞은 이후로 두 번째. 체력이 약해진 건지 너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증세가 더 심각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환절기인 탓인지 병원에 대기 인원이 제법 많다. 빠듯한 시간을 계산하며 초조하게 간호사들을 응시하지만 그건 내 사정일 뿐. 30여분을 훌쩍 넘기고 나서 간신히 이름을 부른다. 수액까지 맞고 싶다는 말에 의사는 간단한 감기약과 수액을 함께 처방해 준다. 지하 링거실로 이동해 배정된 침대에 익숙하게 눕는다. 수액병이 제법 크다. 간호사를 보자마자 "30분이면 가능할까요" 묻는다. 황당한 말이라도 들은 듯 "아뇨, 한 시간은 걸립니다"라고 대답하더니 "수액을 좀 빨리 떨어지게 할까요"라고 말한다. 휴식이 필요한 것 같은데 시간을 계산하는 모습이 안쓰러운 듯 링거의 속도를 조절해 주더니 형광등 스위치를 내리고 나간다.


1시간 미만이지만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다. 노란 액체가 내 몸 곳곳에 스며들어 늘어졌던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길어도 짧아도 회복에 7일이 걸린다는 감기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내곁을 떠나 주기를 기도하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사무실 일정부터 개인적인 스케줄들을 소화하며 하루하루를 채우는 사이 가을이 훅 스며들었다. 미화원 아저씨들을 괴롭게 하는 은행나무는 어느새 노란 이파리들을 융단처럼 펼쳐놓고 행인들을 기다린다. 공원과 공연장마다 낭만 음악회, 가을 콘서트, 피크닉 데이 행사에 각종 체육행사와 단합대회까지. 그동안 참았던 욕구들을 모두 한 번에 분출이라도 하려는 듯 경쟁적으로 손짓한다. 덩달아 그 대열에 합류하다 보니 가장 큰 부작용은 마음이 헛헛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의욕이 넘쳐 욕심껏 주문해 쌓아 둔 산문집들과 시집, 소설책들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애가 탈것이다.


매년 시월 마지막 날 개최하는 행사에 함께 하고 싶지만 못 올 것 같다며 지인이 건네준 묵직한 꽃다발로 모처럼 집안이 향기롭다. 색깔별로 소국들을 비롯해 어여쁜 빛깔을 자랑하는 그녀들 덕분에 가을을 가슴에 품어본다. 이번 주말에는 여유롭게 가을을 만나러 작정하고 나서봐야겠다. 그동안 미뤄둔 책들도 읽고 가고 싶지 않은 곳들은 좀 패스하고 내 마음이 가고 싶어 하는 일들에 나를 오롯이 쏟아붓는 시간들이 간절하다. 카톡 프로필 문구처럼 "따뜻하지만 담당하게, 물 흐르듯"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 가을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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