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갑작스레 성사된 그녀들과의 만남. 장독대와 조경이 예쁘다고 소문난 한식집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향했다. 친구 남편이 꼭 한번 가봐야 한다고 일렀던 곳이라는 말에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한다. 식당에서 15분쯤 걸려 드디어 카페에 도착. 주차장이 널찍하고 건물 외관이 세련된 미술관을 연상하게 한다. 입구에서 뒤태 사진까지 찍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로 입성. 건물 1층 우측에 공연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스크린에 tv에서 방영된 노래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객석 곳곳에 마치 콘서트라도 온 듯 음악을 즐기며 차를 마시는 손님들이 보인다. 카페 빈 공간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설치되어 있어 사진 찍기에 제격이다. 주문에 앞서 먼저 2층으로 올라가 공간을 꼼꼼히 살핀다. 특별할 것 없는 넓은 카페 풍경인가 싶은데 폴딩 도어를 열고 나간 야외에도 많은 의자가 놓여 있어 봄, 가을에 와도 좋을 듯하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며 1층으로 내려와 주문을 마치고 마침내 공연실 맞은편에 있는 음악실 발견. 바로 친구 남편이 꼭 가보라고 한 그곳이다. 그의 말대로 한쪽 벽면 전체가 LP판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추억의 DJ오빠의 모습이 시선을 멎게 한다. 친절하게 포토존까지 마련되어 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부터 어르신들까지 여러 팀이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있다.
먼저, LP판 가득한 벽면을 사진으로 담고 꼼꼼하게 공간을 둘러본 후 객석처럼 꾸며진 맨 윗자리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 동안 신청곡 메모지를 들고 와 곡 선정을 시작한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고등학교 때 함께 즐겨 불렀던 팝송제목이 튀어나온다. 제일 먼저 그룹 포코의 <sea of heartbreak>를 동시에 외친다. 영어를 그리 잘했던 기억은 없는데 지금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나도 모르게 가사가 튀어나오는 유일한 팝송인데 신기하게 친구들도 그렇다며 입을 모은다. 영어선생님을 좋아해 결국 영어교육과에 진학해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늘 팝송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마도 그 덕분이 아닐까 싶다. 팝송 마지막에 가을 내내 자주 들었던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까지 추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DJ오빠의 선곡을 기다리며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나 흐릿한 조각들을 하나씩 들춰내어 퍼즐을 맞추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의 인연은 햇수로 35년을 지났다. 고2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자가용으로 40분 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한다. 가끔 소식을 전하고 일 년에 두어 번 만나 공연을 보거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그 공백들이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 학창 시절 어쩌면 경쟁 자였을 텐데 그런 기억은 거의 없다. 함께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던 기억보다 옥상에 모여서 장기자랑을 하며 웃었던 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를 맞으며 거리를 쏘다니고 제과점에서 빵을 먹었던 추억들이 더 강하게 각인되어 남아있다. 드디어 신청곡 메모지에 적은 곡들이 흘러나온다. 마치 콘서트장에라도 온 듯 입을 모아 따라 부른다. 자연스레 몸에도 흥이 실린다. 그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DJ가 즐거워하는 우리 모습을 언급한다.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동안 친구가 오늘 제일 잘한 일은 이곳에 온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친정 부모님이 편찮으셔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오래간만에 보는 밝은 모습에 괜히 마음이 짠해지는 순간이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 부부도 이 분위기가 익숙한 듯 연달아 신청곡을 적어 내며 흥에 겨운 듯 어깨를 들썩이며 분위기를 즐긴다. 아마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음악애호가가 아닐까, 혹시 저 DJ 아저씨가 사장이 아닐까 마음대로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며 음악실에서 한 시간여 정도 머물렀다.
누군가와의 인연을 오래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학교나 직장 때문에 멀어지면 어느 순간 의도와 관계없이 연락이 뜸해지고 그렇게 잊히기도 한다. 하지만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연락을 하고 얼굴을 보면서도 편안하게 이어지는 인연들도 있다. 법정 스님의 말처럼 그들과는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억겁의 인연의 끈이 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내가 출세를 하거나 잘 나가지 못해도 불편하지 않고 부족한 면들을 그냥 내 모습으로 인정해 주는 사람. 그것이 결코 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따듯하게 감싸주는 사람. 기쁜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여기며 축하해 주면서 참 잘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 어느 날 홈쇼핑에서 3종세트 니트를 구입하면 하나만 남겨두고 두 개를 챙겨 정성스레 포장해 갖고 오는 사람. 아픈 부모님을 위해 주말마다 먼 길을 나서는 친구를 위해 맛깔스러운 반찬을 잔뜩 챙겨 곁을 지켜주는 사람. 그녀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코트가 추워 보인다며 선물로 챙겨 온 니트를 입으라고 재촉하는 그녀 덕분에 따듯한 시간을 보내고 그녀들과 다음을 기약한다. 아마도 내년 초쯤에나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어여쁜 그녀들이 늘 건강하길, 그녀들이 머무는 공간에서는 늘 향기가 가득하길 기도한다. 당신의 따듯한 손길은 내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추억입니다. 다시 내 소중한 사람이 되어 주세요.... 오래도록 잊고 있던 팝송 가사가 생생하게 기억날만큼 추억은 참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