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후회에 익숙하다
한 때는 사랑이 전부라 생각했다. 어쩌면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사랑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처음 시작한 사랑은 마치 폭풍과도 같이 내 삶을 지배해나갔다.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지고 나면 곧 다른 사람을 찾아 사랑을 시작했고 그런 반복이 이어지는 동안 정말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라는 풀리지 않는 굴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또 다른 사람으로 대상을 옮겨가며 '사랑'을 찾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피로와 고단함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경멸이었을 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타인과의 교감' 같은 것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지난 연애를 돌아본다는 것은 약간 멋쩍기도 한 일이지만 마음이 그래도 가벼워진 지금은 차라리 편하게 기억을 추슬러볼 수 있었기에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감상 아닌 감상에 빠져보기도 했다.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들을 하나둘 지우고 나면 근본적인 두 사람만의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렇게 바라본 과거의 내 연애시절은 하얀 백골 위에 낀 이끼처럼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에 쫓기듯이 서둘러 연애를 했었기에 그 기반이 애초에 부실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 스스로가 관계 자체를 감당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돌아보던 중에 그래도 기억에 남는 시간이 있는데 만남의 시작부터 돌이켜보면 그녀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어느 겨울날 새벽이었다.
나는 사랑을 통해 내 삶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렸지만 그녀는 아무런 요구도 바람도 없이 그저 내 곁에 있는 것으로 행복하다 느꼈던 그런 관계. 사실 이런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사랑,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찾고 앞으로 나아갔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서조차 급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대처했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까..라는 미안함이 몰아쳐오지만 이미 지난 시간 속에서 낡아버린 책장이 된 기억이다...
사랑에게 길을 묻거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 그녀가 내 곁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된 다음에야 깨닫게 됐다. 나라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일상 자체의 초점을 옮기고 살았던 그녀인데.. 나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었다.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던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새겨지고 또 새겨졌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 했고 그렇게 그녀를 보내야 했다.
그렇게 이별을 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지고를 반복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여전히 반갑게 내게 인사를 했지만 대화 말미에 '저,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리고 곧 결혼해요.'라는 말을 내게 전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래 그런가 보다.. 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나란 사람이 얼마나 무디고 또 몰인정한 지...
겨울이 오면 그리고 찬 바람이 옷깃을 뚫고 가슴에까지 들이칠 무렵이 되면 그 춥던 새벽바람을 온통 맞아가며 이야기하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아마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몇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