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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꼽 Aug 10. 2023

공주의 기억

02-1

"이것 봐라~ 우리 아기 쌍꺼풀이 있어. 속눈썹도 정말 길지? 아마 미스코리아가 되려나 봐."


스물여섯의 형원은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아빠가 되었다. 딸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모임에 얼굴을 비추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주장이 빠진 축구회는 점차 운동장이 아닌 곳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형원의 집. 고향 친구들도, 회사 동료들도 형원의 딸 '보라'가 궁금해서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집안의 첫 아이이면서 아빠 친구들 사이에서도 첫 조카였던 보라는 늘 귀여움을 받았다. 보라는 쑥스럽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 때면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상은 얼른 보라의 편이 되어주었다.


보라가 단 한 번 자신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적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 동생의 출생이었을 것이다. 보라는 다섯 살 되던 해에 누나가 되었다. 엄마의 볼록한 뱃속에 동생이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와 따로 자야 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보라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잠자리 독립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분명 누나는 혼자 씩씩하게 잘 수 있다고 했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이며 기다려도 보라 누나는 씩씩해지지 않았다. 방에 조그맣게 딸려있던 베란다 문에는 하필 망입유리가 입혀져 있었다. 장식 겸 사생활 보호 목적으로 붙어있던 그 망입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자동차 불빛은 보라의 방을 얼룩덜룩한 공포로 물들였다. 보라는 이불 끝을 움켜쥐고 씩씩한 마음을 기다렸다.


"보라야. 자니?"  


아빠였다. 역시 아빠가 보라를 구해주었다. 아빠는 매일 밤 책을 읽어주고, 보라가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때로는 보라 곁에서 잠들어 버리는 날도 있었다.



“아빠. 나는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형원은 보라가 느끼고 있을 법한 '첫째의 상실감' 같은 감정을 살뜰히 살폈다. 일부러 일찍 퇴근해서 유치원에 보라를 데리러 간다든지, 침대 아래에 보라가 갖고 싶어 했던 쥬쥬 인형을 숨겨두기도 했다.

  

보라는 아빠가 진짜 마술을 부릴 줄 안다고 생각했다. 주말 아침, 누워서 쉬고 있는 아빠에게 달라붙어 '아빠 심심해.'라고 말하기만 하면 아빠는 지체 없이 마술을 부렸다.


'수리수리 마수리 얍'


그러면 냉장고에는 빠삐코가, 책꽂이 뒤에는 치토스가, 때로는 침대 아래에 갖고 싶던 인형이 있는 날도 있었다.


아빠는 섬세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슈퍼맨이었고, 보라는 아빠만의 작은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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