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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아민 Sep 13. 2022

부부로 산다는 것

사소한 부부싸움

어떤 미운 장난에도 화를 내는 법이 없던 남편은 그날 처음으로 화를 냈다. 아니 평정심을 잃었다.


남편은 지독히도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치 희로애락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 어디서나 남편답게 기분을 관리했다.

그런 반면 나는 평정심 따윈, 관리가 되는 게 신기하다고 여길 만큼 널뛰는 감정 기복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편과 함께한 거의 3년이란 시간 동안 울고 웃고 화내고 즐거워하는 쪽은 나였다.


그런 우리에게 약간 어색한 시간이 생겼다.

아주 사소한 이유였다. 남편이 화가 난 이유는 내가 이해 못 할 정도의 사소함이었다.


날이 조금씩 서늘해져 민트색 3인용 소파에 얇은 여름이불을 하나 놔뒀다. 은근히 추위에 약한 남편을 위한 이불이었다. 마주 보고 있는 현관 쪽 창문과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바람이 상당히 강하게 분다.

문을 열기엔 춥고 닫기엔 덥덥한 공기가 맴돌 땐 우린 두 문을 열고 이불을 덮는 걸 택한다.


해가 진 후 날이 쌀쌀해졌다. 우린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꽤 강하게 바람이 불어 현관 앞에 줄지어 놔둔 분리수거통이 흔들렸다. 나는 현관 쪽 창문을 닫고 부엌 쪽 창문과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답답한 것도 싫고 그다지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싸늘함을 느꼈는지 소파 위의 이불을 펄럭거리며 제 몸을 다 덮었다. 난 소파 끝에 앉아 늘 그랬듯 남편의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얹어 종아리를 주물럭거렸다.


"추워?"

"응 좀 춥네."

"그래? 나는 하나도 안 추운데."

"그래도 모르니까 다리만 덮고 있어."


남편은 이불을 양쪽으로 펼쳐 내 다리까지 덮었다. 나는 내 허벅지 위에 올린 남편의 종아리 열기와 소파에서 올라오는 열기 그리고 내 몸에서 뿜어대는 열기에 하체가 조금씩 더워졌다.


"나는 더워."


이불을 조금 걷어 한쪽 다리를 밖으로 꺼냈다. 찬 기운이 뜨근한 다리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오빠는 안 더워? 오빠 다리도 따끈한데?"


나는 이불을 조금 더 걷어 남편의 무릎 위로 올렸다. 남편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도로 이불을 내렸다.


"나는 추워."


순간 장난기가 일었다.


"남자는 시원하게 있어야 한다고 했어. 조금만 참아봐."


이불을 획 걷어 엉덩이 밑으로 깔았다. 남편은 웃으며 이불 끝을 잡아당겼고 나는 끌려가는 이불을 몸을 돌려 허벅지 안쪽에 끼워 최대한 힘을 주었다. 허벅지 힘이라면 빠지지 않는 나였기에 역시나 남편은 낑낑거리며 이불을 당겼다. 그러다 이불에 실밥이 터질 것 같았는지 몸을 일으켜 허벅지 사이게 끼워진 이불을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나는 내 허벅지에 가해지는 힘이 커질수록 더욱 힘을 줬고 남편은 얼굴까지 빨개지며 다리를 밀어내려 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 남편은 더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진짜 추워. 이불 줘."

"싫은데 싫은데 뺏어가 보시지?"


평소 남편과의 힘 씨름을 즐겼던 나는 남편을 더욱 도발했다. 남편은 다시 한번 있는 힘껏 내 허벅지를 밀어냈고 난 살이 밀리는 고통에 힘을 확 풀었다. 이불을 쟁취해간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목 끝까지 덮었고 나는 벌게진 허벅지를 보며 따져 물었다.


"와, 내 허벅지 빨개진 거 봐. 이불이 그렇게 소중하냐?"

"춥다고 했잖아."


나는 다시 한번 이불을 당겼다. 남편은 뺏기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서로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내 허벅지 좀 보라고! 빨개졌잖아! 아프다 아파!"

"그러니까 누가 장난치래?"

"아 겁나 아프네. 임신 준비 중인 와이프한테 고통을 주면서까지 이불을 쟁취하고 싶니?"

"아니, 춥다고 했는데도 안 준 게 누군데."

"허벅지 아프다고! 무슨 힘을 그렇게 주냐!"

"그러니까 이불 줬으면 됐잖아."

"허벅지 빨개진 거보소! 이거 찍어서 증거물로 확보해야겠어!"


그때 이불이 획 재껴지면서 남편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아 그래 안 덮을게 네가 가져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남편을 나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같이 웃고 있었던 얼굴엔 웃음기가 싹 빠졌고 몸을 덮고 있었던 이불은 바닥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나는 이불을 집어 올려 남편 몸에 올렸고 남편의 미간이 좁아지며 도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에? 진짜 화난 거야?"

"안 덮는다고."

"아냐 덮어. 미안해."

"안 덮는다니까? 주기 싫다며 그러니까 안 덮는다고."


솔직히 서로 장난치며 웃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포인트에서 화가 난 걸까? 혹시 화난 척 장난치나 싶어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남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해 소파에서 내려앉아 남편 얼굴 근처로 갔다.


"많이 추웠구나? 미안해 응? 그냥 장난친 거야. 화 풀어라 응?"

"... 됐어."

"그러지 말고 화 풀어 응? 미안해 응?"

"내가 춥다고 했으면 정도껏 해야지 지 아픈 거만 계속 말하고... 아 됐다고. 앞으로 너한테 안 맞춰줄 거야."

"... 미안해."


남편은 그 뒤부터 말이 없었다. TV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순간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어 내 마음에도 작은 쇳덩이가 만들어졌다. 나는 다시 내가 앉아있던 소파 끝으로 가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돌돌 감아올리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남편은 소파에서 스르륵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대체 화가 난 포인트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서로 웃으면서 장난쳤고 장난이 좀 심해져서 상처를 입은 건 엄연히 나였다. 따지고 보면 피해자는 나 아닌가?


거실에 남아있는 검은 기분에 휩싸이기 싫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달이 환하게 떠있는 하늘을 보며 익숙한 길을 걸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불을 안 준 게 그렇게도 화가 날 일인가? 아니면 여태 쌓였던 또 다른 이유들이 있는 건가?

매사에 심드렁한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 추운 걸 엄청 싫어하나?


평소라면 내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댔을 테지만 그때는 내 감정이 아닌 남편의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어쨌든 화가 난 건 남편이었고 감정표현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니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걷기 시작한 지 15분이 지났을까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답을 내지 못했기에 받지 않았다. 솔직히 걱정 좀 하라는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5분쯤 지났을까 건너편 아파트 놀이터를 맴돌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엔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응."

"어디야?"

"...**아파트 놀이터."

"알았어. 지금 갈게."

"아냐, 피곤한데 집에 있어. 조금 걷다가 들어갈게."

"어차피 좀 걷고 싶었어. 거기 있어."


평상시의 다정한 남편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다른 아파트로 넘어가려고 했던 발길을 멈췄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마음이 상해 집을 나왔을 때 날 데리러 온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울면서 집을 뛰어나갔을 때도 난 늘 혼자 밤길을 걸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가 어딘지 물어봐주고 데리러 오겠다는 사람이 생겼다.

결혼이란 게, 반려자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잠시 뒤 횡단보고 건너편에서 남편을 발견했다. 원래라면 손을 붕붕 흔들어 반겼을 테지만 마음속에 가라앉아있던 앙금이 아직 말끔히 해소되지 못했다.


"안녕?"


나는 내 옆으로 와 손을 잡는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혼자 나와서 뭐해. 전화도 안 받고."

"그냥, 속이 울렁거려서 나왔어."

"또 혼자 이상한 생각 한 거 아니고?"

"아냐, 이번엔 오빠가 화난 포인트가 어딜까 분석하고 있었어."


남편은 나를 시소 끝에 앉히고 저도 반대편 끝에 가서 앉았다. 늦은 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으니 적당히 어둠에 가려져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잘 됐다 싶었다. 나는 몸에 힘을 주어 남편 쪽 시소를 위로 올렸다.


"오빠, 뭐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거야? 알고 싶어."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어하는 남편은 침묵으로써 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 기다렸다. 그저 '아냐, 화 안 났어. 괜찮아.'라며 제 감정을 회피하지 않는 것만도 고마웠다.


"이불 달라고 했는데 자기가 안 줘서."


긴 침묵을 깨고 남편이 말했다. 그 말은 집에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추운데 내가 이불을 안 줘서 오빠가 화난 거야? 장난친다고 그랬는데 미안해."

"응. 나도 처음엔 장난친 거였는데, 자기 허벅지 아픈 것만 말하고 춥다는 내 말은 듣지도 않아서 좀 그랬어."

"아, 내가 나 아픈 것만 생각하고 오빠 추운 건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구나. 그렇게 느껴졌다면 그것도 미안해. 내가 오빠를 무시한다고 느꼈어?"

"그건 아닌데, 자기는 이불을 가지고 있었고 난 그 이불이 필요해서 달라고 한 건데 말 안 듣고 자기 아픈 거만 생각하고 짜증 내니까 그게 좀 화가 났어."

"음... 오빠가 원하는 걸 내가 갖고 있는데 그걸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구나?"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난 괜히 웃음이 났다. 제 감정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이 있던가 싶었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남편 같은 성향의 사람이 분노하는 포인트를 말이다.

남편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인연을 끊거나 화가 나는 지점은,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이유 없이 들어주지 않을 때'였다.

'추우니까 이불을 달라'고한 건 남편의 입장에선 정당한 요구였고 난 그걸 장난친다고 들어주지 않았다.

처음엔 장난으로 받아들였겠지만, 나중엔 내 몸에 생채기가 생기니 당황스러워 회피하고자 한 게 '화'로 표현됐으리라 싶었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위로 뛰어올랐다.


"이제 알겠어. 미안해. 이렇게 말해주니까 오빠가 뭐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지 알 것 같아. 아까는 갑자기 표정이 바뀌어서 좀 당황스러웠거든."

"내 친구들도 내가 뭐 때문에 화가 나는지 잘 몰라. 나만 아는 거니까."

"그럴 것 같아. 오빠가 기분 나쁜 티를 안내면 친구들도 그렇고 나도 잘 몰라. 말해줘야 알지 않을까?"

"뭐하러 굳이. 그냥 참으면 되는데."

"응 그래도 오빠가 어떤 포인트에서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는지 말해줘야 주변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을까? 물론 나도 그렇고. 오빠만 알고 있는 그 부분을 나도 알고 싶은데."

".........."

"말하는 게 오빠한텐 힘든 일일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폭발해버리면 오늘처럼 난 너무 당황스러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약속하나 정하자. 장난치다가 오빠가 기분이 나빠질 것 같으면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 바로 그만할게. 어때?"

"... 알겠어."


어둠 속에 가려져 남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신호가 뭔지는 어렴풋 느낀 것 같았다. 우리는 밤하늘이 예뻐서 걷기가 좋더라, 달이 예쁘게 떴더라, 날이 선선해져서 좋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끼그덕끼드덕 시소를 탔다.


"이제 그만 갈까?"


남편은 시소를 평평하게 놓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시소에서 내렸다.

나는 남편에게로 가 손을 꼭 잡았다. 이번엔 신기하게도 나만의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헤엄치지 않았다.

자책감에 물들지 않았고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나를 떠나가면 어쩌지, 나를 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떨지 않았다. 아마 내가 그런 생각에 빠질까 봐 남편이 나를 걱정한 것 같았다.


"혼자 나와서 걷지 마. 또 이상한 상상 하면서 불안해할 거면서."

"... 오늘은 이상한 상상 안 했어. 오늘은 오빠가 어디에서 화가 난 걸까 생각했어."

"아무튼 전화도 안 받고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다고."

"밖에 나와있었어? 언제부터?"

"처음 전화했을 때도 밖에서 전화한 거야. 안 받아서 계속 기다렸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동동거리며 걱정하고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고소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엉덩이를 토닥였다. 남편은 쑥스러운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냥 뚱한 채로 있는 거보다 빨리 푸는 게 더 좋아."

"응 나도. 데리러 나와줘서 고마워."


나는 남편의 팔짱을 끼며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이런 걸로 결혼한 걸 실감한다는 게 우습다.

우리는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야식으로 뭘 먹을지 고민했다. 방금까지 속이 상해 울었던 내가 맞는지, 이렇게 금방 풀어지는 사람이었나 스스로 놀라웠다. 깍지 낀 손의 손가락을 마디마디 맞대어 쓸며 웃었다.


"왜 웃어?"

"그냥, 오빠를 만난 게 다행이다 싶어서."

"그렇지? 나 같은 남자 어디 없다."

"알고는 있는데 그걸 오빠 입으로 말할 땐 좀 재수 없어."


한 번씩 맞는 말을 하면 재수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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