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으로 스미는 바람이 차다. 쨍한 매미소리가 줄어들고 가을의 악사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계절이 돌아왔다. 집순이인 내가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계절, 가을.
옛날부터 노랗게 영롱함을 내리는 달을 좋아했다.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린날부터 위로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지금까지 가을밤이 오면 달을 따라 어김없이 밖으로 나섰다.
집 앞에 일자로 쭉 뻗은 산책로가 있다. 여름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서늘한 바람이 부는 지금은 긴팔 옷을 입고 걷거나 뛰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있다. 가을밤에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달을 좇아 걷기 시작하면 명치부터 찌르르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올랐다. 난 그 느낌을 행복이라 불렀다.
가을밤이 주는 냄새는 달랐다. 흙과 풀에서 올라오는 시원하면서도 구수한 냄새와 물가에서 피어나는 물비린내가 적절히 섞여 풍부한 가을 냄새를 만들어냈다. 발끝에 차이는 자잘한 돌멩이를 야무지게 밟고 걷다 보면 두 갈림길이 나온다. 물가로 내려갈 수 있는 내리막길과 오솔길처럼 걸을 수 있는 쭉 뻗은 길이었다. 원래는 내려가면 올라오는 게 싫어 고민도 없이 앞만 보고 걸었겠지만, 그날은 왠지 물가 근처에서 걷고 싶었다.
물가에 다가가면 갈수록 물 비린내가 진해졌다. 그리 깨끗한 물은 아닌지라 중간중간 고릿한 냄새도 같이 올라왔다. 그래도 젖은 흙내와 함께라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나는 물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 앉았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해 물결이 은은하게 일렁인다. 넋을 놓고 물결을 보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귀속에서 울리는 노랫소리를 따라 작게 흥얼거렸다.
이어폰이 고장 났나?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다른 소리가 겹쳐 들렸다. 이명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중지시켰다. 가장 크게 들렸던 음악소리가 꺼지니 웅얼거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주변이 어두워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느낌도 있었다. 나는 퍼지듯 들려오는 소리를 좇아 걸었다. 다리 밑을 지나니 스테레오 같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달빛에 기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움직이는 작은 불빛이 보였다. 소리의 근원지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뭘까. 그 주변에 스피커라도 있는지 살폈다. 다 먹은 물병 하나와 길쭉한 케이스가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잠시 뒤 작은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등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가 무선마이크를 들고 숨을 들이마셨다.
부끄럽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싫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려는데 웬걸, 뚱뚱한 마이크에서 꽤 감미로운 음색이 흘러나왔다. 웅웅 거리는 하울링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저음부터 시작하던 노래는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무선 마이크에서 나올 수 없는 부드러운 고음이었다. 나는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상에 앉았다. 몸 전체를 쓸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과 달빛이 달달하게 비추는 주변, 그리고 귓가에 울리는 하울링이 섞인 노랫소리가 뜻밖에 힐링이 되었다.
평소에도 버스킹 하는 사람들만 보면 자리 잡고 앉아 듣는 걸 좋아했다. 물론 실력이 아쉬워 빨리 자리를 뜨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적어도 10분은 앉아있었다. 그의 노래가 버스킹 못지않았다. 가수를 준비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세곡을 연달아 불렀다. 중간중간 선곡을 하느라 노래가 끊기기도 했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게 귀가 즐거웠다. 밤 10시가 지나는 시간, 더 듣고 싶었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귀가 즐거운 산책이었다. 또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좀 아쉽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여운을 느끼고 싶었다.
훌륭한 노래를 듣고 나면 노래 부르고 싶어지는 건 나뿐만일까?
조만간 노래방에 출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