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언어..

해외에 살면 과연 외국어를 잘하게 될까.

by slowcarver
모국어, 영어, 그리고 스페인어 - 3개국어 사용자



나는 한국어를 쓴다. 토종 한국인으로서.

요즘 희한한 신조어가 많이 생기고, 잊혀지는 단어가 늘어나는 와중에,

그래도 나만은 제법 많은 단어를 알고 곧잘 사용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영어는....

형편없는 실력이기는 하지만, 의무교육의 혜택으로 & 회사 복지의 혜택으로

여행 가서 쓸 정도는 되는, 나름 중급 정도는 되는 실력이라고 소심하게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평생 배우리라 생각도 못해본- 스페인어.

이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에서 근무할 기회가 생겼기에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3개국어 사용자가 되는구나.'ㅎㅎㅎ



그러나, 언어가 정말 호락하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전반적 언어 능력의 퇴화가 진행되고 있다. (꾸준히)

곧잘 하던 한국어는 자꾸 오타를 낸다. 잘 안 쓰는 단어는 철자를 헷갈린다.

처음엔 실수려니 했는데 안 내던 오타가 너무 많아진 걸 보니 실수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여행용 정도는 되었던 영어는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 한다.

아주 기본적인 단어조차 한참의 버퍼링 후에야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영어는 스페인어를 시작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내 머릿속에 지우개 상태다.


그렇다면 스페인어는? 아, 이건 그냥 정신없이 쓴다.

문법 개념 없이 동사와 명사를 이리저리 섞어서 되는대로 말하는데,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이걸 또 기똥차게 알아듣고는 시킨 대로 일을 해준다.

이제 이 언어를 제대로 배워봐야겠단 초반의 강렬한 의지는 사라지고 있다.



기대했던 바와 현실의 사이


처음 해외에 나올 때는,

모국어는 물론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평생 썼는데 전혀 이상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영어와 스페인어가 모두 두루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다.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테고, 여차하면 영어를 쓰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일단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하니,

스페인어가 느는 건 보이지 않아도, 영어 능력이 급감하는 건 확실히 보였다.

상대적으로 모국어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줄고 있는데,

이건 같이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과 곧잘 대화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나 뿐이었다면, 한국어가 줄고 스페인어가 좀 더 늘었으리라)



내 언어의 그릇


언어를 배우면서 종종 드는 생각은 언어 능력이라는 그릇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릇은 정해진 크기가 있는데 새로운 걸 부어 넣으니 있던 것이 넘쳐 쏟아진다.

정말 미친 듯이 언어만을 판다면, 그릇 자체를 큰 것을 바꿔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하러 나와서 언어 그릇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새 언어를 자꾸 넣으려니,

작은 그릇은 이래저래 차고 넘치고 쏟아지고 난리도 아닌 듯하다.

외국어를 자주 접하는 만큼 유창하게 말하고픈 갈증이 커질 때가 많다.

언젠가 그릇 자체를 키울 수 있는- 언어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



그래도 내가 얻어 가는 것들.

도대체 하나의 언어를 할 줄 안다라는 건 어느 정도의 능력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3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하나 정도 간신히 하는 것으로 봐야 할지.

중요한 건 해외에서 산다고 그 나라의 언어가 느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의 거부감을 줄일 수는 있겠다. 언어를 개뿔도 못해도 자연스러울 대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닌 이상, 모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이상 언어는 늘지 않는다.

문법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제 3의 언어를 구사하게 될 뿐이다.


해외 근무를 나오기 전엔 정말 궁금했다. 나는 스페인어를 얼마나 잘하게 될까.

업무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많이 늘 것이라 생각했고, 기대가 컸다.

그러나 이제는 답을 안다. 나는 아주 엉뚱한 언어를 (매우 잘?) 구사하고 있고,

외국인들과 언어 아닌 언어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도 나름. 살아가는데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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