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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얏 Oct 23. 2022

서울 나들이 7

국제다큐영화제를 보다.


EBS에서 국제다큐영화제가 진행 중이다. 오늘 나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마지막 인형극'을 봤다. 퇴근 시간 서대문에서 경복궁, 광화문의 거리는 번잡했다. 인사동과 종로를 새벽까지 돌아다녀 볼까 했는데, 차마 그러지 않았다. 서울을 산책하기로 했던 날로부터 벌써 9일 째다. 둘러보고 싶었던 곳들이, 하루종일 눌러앉아 거리를 내다보고 싶었던 곳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내일과 모레면 이 산책도 끝이 난다. 산책을 가고, 노트에 글을 써대고, 또 밤이면 이렇게 끄적거리는 짓거리를 왜 하는지에 대해 잠시 남겨보고 싶다.


 산책을 떠나기로 했던 것은, 방학 동안 여유를 갖지 못함이 컸다. 계절이 끝나고, 과외가 시작되고, 그러다 보니 8월 보름까지 왔다. 누구는 피서를 가고, 바다에- 계곡에- 어디든 놀러들을 가지만 나에게 필요했던 건 혼자 있을 시간과 나를 놓아버릴 시간이었다. 올해부터, 나는 권태기였다. 인생의 권태기가 찾아온다는 건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다. 이미 권태기에 들어서버리면, 나를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도 자꾸만 권태기로 기울어지고- 나의 공부도, 나의 일상도 권태기로 기울어진다. 분명히, 올해 열정 같은 무모함이 없었던 것 같다. 청춘이라고 지껄이고 다녔던 게 얼마나 지났다고, 내 입에서 젊음이니 청춘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들이 싹 사라졌는지. 이건 나 스스로에게 고하는 암시이자 선언이었다. 이전부터 자꾸만 속에서 뭔가 쌓여가는 것을 점진적으로 느껴왔고, 그것들이 한데 뭉쳐 덩어리처럼 가슴 끝 뭉치를 콱 막고 있노라면- 어느 거리를 걷더라도 깊은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유독 겨울 공기에 그랬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이 깊은 한숨은 몇 년 전부터 더이상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이전과도 같은 절박함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어서, 이전에는 감춰뒀던 그것을 이제는 온몸으로 겪어내고 싶어서 이전의 습관을 되살렸고. 그 습관은 다시금 노트에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제는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랜 노트 뭉치를, 나는 단 한 번도 다시 들쳐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더이상 내 안에서만 뭔가를 이뤄낼 수가 없었다. 이전에 노트 뭉치들이 쓰일 때 나는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고 또 반성한 것들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들은 모두 내 안에서만 이뤄졌던 것이었고, 23살 때부터 다짐했던 것이 알고 있는 것을 겪어보자는 것이었다. 짧지만 잔잔한 산책이었다. 내일 떠나는 파주와, 모레 떠나는 유년의 장소는 기록할 생각이 없다.


 '마지막 인형극'은 인도의 한 마을 이야기다. 이 마을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무척 빈곤하다. 빈민가 사람들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말하고,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말한다. 인형술사와 곡예사, 마술사.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들-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제작과 관련된 편집, 촬영 기술과 구성에 대해서는 함구하되 나는 그들이 말하는 예술가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우리는 누구를 예술가라고 부를까. 화가? 음악가? 조각가? 무용수? 작가?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배운, 사람들이 예술가라고 부르는 범주는 고작해야 어느 학교에 무슨 과와 연관될 수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쉽게 말해 사진과가 있고 서양화, 동양화, 회화, 조소, 발레 등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런 환경이 갖춰진 것 말이다. 이 마을에서 예술가란, 인형술사, 곡예사, 마술사, 서커스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자.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심지어 이것은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집안의 '무엇'이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한 꼬마 아이는 동전을 갖고 뭔가를 하는데 '이게 예술'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 예술가들은 길거리에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받는 돈이 곧 생계와 직결된다. 이들의 마을에는, 원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땅 위에 집을 짓고 모여 촌을 이룬 1세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 있다. 이들이 아무리 빈민가라 불리어도 언제나 웃고 떠들고 살아가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예술'이 있어서 아닐까.


 그러다 이 마을의 소유권을 가진 정부가 사업가에게 팔아버리는 일이 생기고 만다. 사업가는 이 마을에 인도 북부에서 가장 발전된 상업지구를 건설할 계획이다. 최첨단 주거 지역과 초호화 건물들, 특권층을 위한 건물과 고층 아파트. 이들 주민들에게 무상 임시 주거를 마련해주고, 이들이 물러간 사이 모든 집을 헐어 그곳에 짓겠다는 심산이다. 마을에는 위기가 나타난다. 주민 대표와 주민들은 회의 도중 말다툼을 일삼고, 모두가 대화를 하여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다. 애초에 땅의 소유지도 정부였고, 정부와 사업가의 결정에 그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거리감이 곧 무력감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탄원서를 내기도 하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예술가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소중한 것이 있다면 지켜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내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 행렬을 이룬다. 이때 나는 눈물이 났고, 마지막에는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예술가들은, 오늘은 날아오르지만, 내일은 사라지리라고 노래를 부르며 행렬을 했다. 너무나 흥이 나게 부르는 이 노래 가사를 나는 필사적으로 담아두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기억해내지 못하고 유사한 말로 되풀어버린다. 임시 주거 지역을 보러간 마을 주민들. 갔다 오고나서 했던 말이 가슴에 남았다. '우리 아들이 20분이면 부실 수 있는 집이다.' '최소한의 시설도 없고, 닭장마냥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우린 그곳에서 3년 내지 5년을 살아야 한다.' 사업가는 그들이 2년 살 집에 더이상 돈을 쓸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연기할 수 있는 사업가들의 뻔히 보이는 간사함이다.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서명을 하나둘 했고. (이 마을의 인형술사는 인도를 대표하는 인형술사이자, 대통령에게 상을 받은 자로 다큐의 주연이다) 인형술사인 그는 깊은 슬픔으로, 끝까지 마을을 위해, 예술을 위해, 사라져만 가는 전통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서명을 했다.


 마술사가 자기 아들에게 하는 말과 함께 다큐는 점차 끝나갔다. 계속 울었다. [우리 예술가들은, 아파트에서의 삶을 살 수 없다.(우리가 아는 아파트가 아니다. 컨테이너를 가축 우리마냥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곧 우리를 잃어버리게 할 것이며, 이 마을은 영영 사라질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예술가인가? 그저 빈민가에 사는 사람인가? 모르겠다... 아들아, 꼭 기억해라. 너가 배워 즐기는 것들. 나중에 너는 인형극을 할 수도, 마술을 할 수도, 곡예를 할 수도 있지만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마라. 과거를 아끼는 자에게만 보여줘라.] 


 다큐를 다 보고 나왔을 때, 해는 저물어가기 직전이었다. 퇴근 시간의 서대문은 어수선했다. 경복궁으로 나 있는 빌딩들과 골목들.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으나 그 뒷골목에는 온갖 환기통과 에어컨의 열기가 뿜어져 골목을 애처롭게 했다. 인기척이 숨 죽이는 골목이었다. 광화문까지 걸으며 인도의 그 마을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그리고 현실에 대해 붙들려 있었다. 노트에 적었던 더 치열한 그들의 삶과, 정신 그리고 그곳에서 보여지는 온갖 예술들에 대해 썼다. 예술이 자본과 형이상학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의 육체와 가깝고 정신과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삶을 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여자 곡예사는, 세상이 빨라서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따라가기 바쁘다고 했다.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 분화되어 있고, 괴리가 컸다.


나는 사이에 끼인 작은 돌처럼 어떠한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도약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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