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얏 Oct 20. 2022

서울 나들이 4


그르니에와 산책하기. 


우연히 마주친 그르니에와 오후를 같이 보내게 되었다. 그르니에는, 어릴 때부터 여전히 늙었지만 아이였다. 나는 '늙음'을 가진 아이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늙어가는 아이는 보기 흉하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아이인데, 더욱이 늙은 체 하는 아이는 가만히 보고 있기가 버거울 정도다. 메스꺼움을 동반하는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그르니에는 너무나 명랑하고 나팔 소리보다 약동적이다.


 우리는 곧잘 말이 잘 통했다.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로 올라가기.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해변가를 내지르기. 어귀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눈으로 빨려들어가 어리둥절해지기. 그르니에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나는 몽상을 즐기기 때문이었다. 몽상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들의 증상(아무래도 사회와,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어떤 '증상'이라고 일컫는다. 살다보면 무조건으로 허용해야 하는 낱말의 강제는 있는 법이다)은 산책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여행을 시작했고, 어느새 인도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 이럴 때면 너무나 반가워 밤새 술 한 잔 걸치며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법이다 - 갑자기 파리에서 길을 걷다 소식을 듣기도 하고, 다시 해변가에서 모래를 갖고 놀기도 했다. 모래를 갖고 노는 아이. 나는 이 아이를 3년 전에 만났었다. 그르니에는 언제 이 아이를 만났을지 - 그르니에와 나와의 산책을 얘기하려면, 모래밭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만 한다.


 모래밭이란, 내가 태어나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이야기의 제목이다. 작가도 알 수 없고, 다만 구전으로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들은 어느 학생이 그 이야기에 사로잡혀 작가가 되었고, 다시 그 이야기를 구전으로 떠돌게 하는 것이, 나에게 닿았다. 나 또한 이 이야기에 아주 강렬하게 사로잡혔었다. A4 1장 분량이나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 짧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지껏 내가 읽어본 글, 들어본 말, 보았던 사람들 중에서 결코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엄청나게 거대한 것들을 일깨우게 해주었다. 동시에, 나는 이 이야기의 원전에 대해서 결코 말할 수도, 글로 옮길 수도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당시 상황을 충격과 공포와도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겪고 난 뒤, 훗날 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키냐르. 바로 당신.


 그르니에와 산책 도중, 나는 키냐르를 만나 너무 기쁜 나머지 그와 재빠른 작별을 준비했다. [모래밭]과 키냐르는 너무나 닮았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과 친해졌다. 말할 수 없는 것과 친해지니 말할 수 있는 것들과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나를 사로잡은 5살의 강렬했던 사건. 이 사건이 발단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어보았고, 그때마다 나는 정말 쓰레기같은 대답으로 메꿔 놓았던 5살의 사건. 이 5살의 사건과 그르니에의 6~7살 때의 사건. 두 사건에 우리의 산책은 이어지고 있었고, 도중에 만난 키냐르를 우리는 환영했다.


 물론 이 세 명이 만난 것은 광막한 바다가 보이는 해변가 위에서다. 우리는 빙 둘러 앉아 침묵했다. 그르니에는 여전히 고양이와 놀고 있는 듯 싶었지만, 역시 그는 바다 위에 표류하는 눈빛으로 가없는 어둠을 그려내고 있었고. 키냐르는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고 나에게 엄청난 덩어리의 말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빛의 흔들림에 맞추어.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었을까. 나의 눈은, 표정은 또 분위기는. 그렇지만 주변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문득 알아차려버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이들을 의식하는 사이에 그르니에와 키냐르는 이미 여행을 떠났다. 나만 아직도 해변가에 앉아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응시하는 것도 아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키냐르가 놀고 간 흔적을 쫓아가며 어떤 놀이에 대해 상상하다가, 저만치 내달리는 그르니에의 발자국을 보고서는 움푹 패인 곳에서 삶의 무게를 그려내다가, 나만이 응시할 수 있었던 구석을 찾아갔다. 구석. 그곳에는 산책의 모든 것이 숨어 있었다. 그르니에와의 산책, 도중에 만난 키냐르. 그리고 떠오르는 모래밭과 그리고서 뒤엉켜버리는 이 모든 장면들. 이 속에서 관통하고 있는 것은 오직, 무관심한 곳으로부터의 은밀한 놀이다, 유희다.


 구석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도 쳐다보지도 신경쓰지도 않는 구석 말이다. 구석이란, 언제나 비인간적인 곳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 오직 나만이 들어서고 나가는 그 곳. 그 곳은 어릴 적 5살의 사건이 생활하는 곳이고, 내가 모자란 놈처럼 누군가에게 상처입었다고 말할 때(태어나서 누군가에게 나의 상처에 대해서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걸 나는 매우 경멸하는 것 같다)의 그 '상처'들이 개화하는 곳이고, 태어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유로이 놀 수 있어서 마음대로 말할 수 없는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한 증상으로 여기는 그런 곳이다.


 내 발이 작았을 때는, 돌아다닐 세상이 적어 곧 발의 크기가 둘러싼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의 구석은 천장 모서리였다. 천장 모서리에서 시작된 구석은, 내 발이 커질수록 다양해졌다. 그리고 어느새부터인가 나는 사람에게서 구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르니에를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르니에의 구석에 내가 무엇을 감췄는지 떠올리면 아무래도 즐겁다. 모래밭의 구석에는 키냐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조우를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슬프게도, 살갗을 맞댈 수 있고, 눈빛의 떨림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만남이길 바랐지만 다시 없을 이 만남은 아무래도 좋았다. 만남과 동시에 작별을 준비해야 하는 이 관계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웃었다. 아직도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내달려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어느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르니에와 키냐르는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혹은 다음에는? 이런 예측은 늙어버린 우리에게 끼어들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우리의 놀이로 또 다시 '지금' 움직이는 이 생을 이끌고 가지 않을까 하고. 키냐르는 잠시 떠났고, 그르니에는 저멀리서 아직도 소리를 지르고 있다. - 나는 모래밭을 떠올리며, 모래를 갖고 노는 아이를 잃어버린다. 그르니에가 언제 만났을까-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잠시 떠오르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모래밭]의 여지를 남겨두고자 형상지었던 그 아이는 파도 한 번에 모래로, 바다로 돌아갔다. 나는 언제쯤 서툰 짓거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떠올리면서, 그래도 서투른 욕망, 서투른 존재, 서투른 삶을 보여주는 사람을 기다린다. 늙어버린 우리에게 끼어들지 못했던 것은, 예측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마음과 몸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능으로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그르니에의 말처럼, 가장한 사람, 위선과 거짓이 곧 진실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과 몸으로 찾으려는 서투른 사람을 기다린다. 요근래 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과 위선을 너무 많이 봐버렸다. - 그르니에와 키냐르가 없는 동물원 산책. 동물들은, 우리에 갇혀 있을 때가 더 보기에 불편하다. 


 나는 오늘 동물원에서 몽상을 즐겼다.




작가의 이전글 서울 나들이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