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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Jan 19. 2023

가까워질 수 없는 우리 사이, 고부 사이

  명절이 어김없이 돌아오니 잊고 있었던 시어머니와의 아련하지 못한 지난 나날들이 종종 생각난다.  뭐 늘 그렇듯 나 또한 어머님과의 추억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고나 할까? 한창 둘의 관계가 소용돌이칠 때는 정말 부부가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시댁 때문에 이혼할 수 있겠다는 말이 사실이구나. 알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서로 눈치를 보고 어려워하는 사이가 되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시어머니 단어만 나와도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일단, 어머님과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기분 좋은 만남을 시작하지 못하였다. 어머님은 나름 대기업 다니는 귀한 아들이 좀 더 탄탄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참한 아가씨를 데려오길 원하셨는데, 나는 27살에 가난한 대학원생으로 직업도 그렇거니와 소위 '싹싹한'며느리 상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어머님은 나를 처음 보신 날, 나에게 당신이 아들을 얼마나 귀하게 얻으셨는지.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기 위해 임신을 한 뒤 홀로 서울로 상경하여 아들인지 딸인지 병원에서 확인까지 하셨다는,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셨다. 아마 이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니 나에게, 그리고 나의 아들에게 잘하라는 말씀이셨겠지.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같은 반항심이 더 크게 들었다. 그렇다. 그것은 나와 어머님의 아주 거칠고 질긴 전쟁의 서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 하나 믿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결혼을 하고 나니 어머님께서는 나에게 시댁의 제사일지가 적혀있는 다이어리를 하나 건네주셨다.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제사는 꼭 챙겨야 한다며 소중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나는 우리 집 제사 때도 띵가띵가 노는 딸이었기에 어머님께서 주신 다이어리는 역시나 받자마자 잃어버렸고 나는 제사를 늘 까먹는 양아치 며느리가 되어버렸다.

세상 타고난 효자였던 남편은 당연히 제사 날짜가 되면 못 찾아뵈어서 죄송하다며 제사비용을 부치고 어머님께 전화를 꼬박꼬박 드렸지만 어머님은 그 전화가 며느리의 전화가 아닌 것이 무척 괘씸하셨다.


역시나 내가 제사를 까먹었던 날 (무슨 제사는 또 그리 많은지), 어머님께서는 화가 단단히 나셔서 나에게 전화를 하시고는 노발대발 화를 내셨다. 어쩜 그렇게 생각머리가 없냐면서.  물론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드렸지만. 그다음 제사도, 그 다다음 제사도 나는 역시나 또 까먹었고 인사를 드리지 못하였다.


후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님께서는 참다못해 남편에게 전화하여 어떻게 며느리가 되어서 시댁 제사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느냐며 흉을 보셨는데 남편이 "어머니, 그 제사가 우리 집 제사이지 어떻게 며느리 제사예요. 제가 챙겨서 전화드릴 테니 그런 걸로 며느리 흉보지 마세요."라고 딱 잘라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님은 울음을 터뜨리시며 전화를 끊으셨다고 한다.

만약 지금 이였다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며칠 전부터 기억해 놨다가 남편과 함께 전화를 드리던 내가 전화를 드리던 하였을 텐데. 그 시절의 나도 참 철없던 며느리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난관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내가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니 나 또한 시댁의 여행에 참여를 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시댁의 규칙을 지키느냐 마느냐였다. 남편 위로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누나가 두 분 있으신데 두 분 다 나랑 열 살, 아홉 살이 차이가 나셨다.

다행히 두 분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터치가 없으셨고 나 또한 그분들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문제는 자매끼리 너무 사이가 좋으니 여행을 종종 다녔고 그 여행이 시댁 전체의 여행이 될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나 또한 여행을 좋아하나 한 두 번 시댁 여행에 참여하였는데 다녀와 보니 이것은 여행이 아니라 거의 자원 노동봉사 수준이었다.

 일단 막내며느리인 나에게는 어떠한 결정권이 없었다. 난 그냥 가라면 가고 앉아 있으라 하면 앉아 있고 자라면 자야 하는. 그냥 시댁 조카와 같은 신세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은 그 여행을 꽤나 좋아하는 눈치였고 나는 그래서 시댁 여행이 잡힐 때마다 남편과 정말 피 터지게 싸우곤 하였다.


물론 남편 말대로 돈도 한 푼 안 내고 좋은 리조트에서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경치 구경하는데 뭐가 불만이겠냐만은 나는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 주말에는 그냥 편하게 내 집에서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 보면서 떡볶이나 먹으며 편하게 있는 게 백 배는 더 좋았다. 그리고 특히나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내 성격상 시댁 식구들 10명과 함께 여행을 다니다 오면 정말 온몸의 기가 다 빨려서 이틀을 꼬박 앓고는 하였다.


그러다 결국 나는 시댁의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나의 선언은 시어머니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아주 결정적인 사건 하나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바로 임신 문제였다.




  20대 후반에 결혼한 나는 4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어머님과 아버님의 눈에는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드셨나 보다. 2년 차가 넘어가자 조금씩 눈치를 주시더니 3년 차가 되자 대놓고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 물음에 너무 솔직하게(?)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고 앞으로도 갖지 않을 것 같다고 나의 입장을 전하였고 어머님은 생각 없이 대답하는 나의 모습에 기함을 하셨다. 그리고 4년 차 때, 내가 시댁과의 여행을 가기 싫다고 거절하자 이것저것 참고 계셨던 어머님의 인내심이 펑! 터지고 말았다.


어머님은 그때부터 나에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내셨다. 명절이라고 (그때도 명절이었다) 내가 수줍게 드리는 제사 봉투를 내 앞에서 휙 던지시며 고작 이것밖에 안 갖고 왔냐며 대놓고 무안을 주셨고, 나를 무릎 꿇리게 한 뒤 넌 정신이 이상한 아이라고. 왜 결혼을 하였는데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사실 나는 어머님의 화나신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었다. 왜냐면 나와 어머님은 비록 친하진 않았지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님께서 나를 싫어하긴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시는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착한 효자이자 자상한 남편 역할이었던 남편은  대화로 이 관계를 풀어나가려고 하였지만 어머님은 남편의 차분한 대화 방식이 귓전에도 들어오지 않으셨다.


그렇다. 어머님은 나에게 화난 것을 모두 표출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도 뭐 그다지 잘하는 며느리 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에게 뭐라 하시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어머님의 화는 이틀에 걸쳐서 명절 내내 계속되셨는데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어머님의 말에 말대꾸를 하며 싸우기에 이르렀다.


그 싸움은 나중에 시누이들과도 이어져 어머님께 서운한 부분, 시누이들과 여행 가기 싫은 부분까지 다 말하게 되었고 그 이후 나는 어머님과 함께 시누이 두 분과도 연락을 끊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다. 30대 중반의 나였더라면 좀 더 현명하게 어머님과의 관계를 대처하였을 텐데.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부드럽게 어른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 몰랐었다. 그저 어머님이 나에게 실수하신 부분만 잡고 끝까지 물고 넘어지니 어머님도 나도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었다.  


아주 재밌는 사실은 그렇게 어머님과 싸우고 난 뒤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며 끙끙 앓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임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만약 임신인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어머님에게 싫은 소리 안 들었을 것이고 그토록 치를 떨던 여행도 참석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나의 임신 소식은 어머님과 나의 길고 긴 전쟁의 휴전을 갖고 왔고 나는 그렇게 열 달 동안 어머님과 평온하지만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물론 아들이냐 딸이냐를 두고 또 한 번의 신경전이 있었지만 다행히 (?) 어머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아들을 가지게 되었고 난 건강히 아이를 낳으면서 어머님도 처음으로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네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덕담을 전해주셨다.




   시간은 흘러 나 또한 아들을 키우는, 어머님과 똑같은 처지인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어보니 어머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어쩌면 나도 어머님도 며느리와 시어머니로는 처음이라 그렇게 서로를 할퀴면서 지냈는지도 모른다. 이제 어머님은 연세가 많이 드셔서 이전만큼의 기력도, 성질도 없으시다. 늘 여기저기 아프시고 큰 수술도 두 번이나 하셨다. 그 와중에 홀로 명절 준비를 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젠 시어머니가 아닌 같은 여자로서 괜히 마음이 아프다.

어머님도 이젠 내가 이전만큼 밉지는 않으신지 "아들 키우기 힘들지? 그렇게 갖기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갖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며 먼저 말씀 걸어주시기도 한다.


사실 어머님과 나는 여기서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인걸 나와 어머님 모두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같으니 둘 사이는 아마 평생 이렇게 어렵고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이번 설에는 내가 좀 더 어머님께 다가가 볼까 싶다. 살갑게 어머님~ 하고 애교는 못 떨지만 어머님 옆에서 슬쩍 궁둥이 밀고 앉아 있으면 어머님이 조금은 마음을 열지 않으실까 싶다. 이번 설은 나와 어머님 모두 웃으며 끝내는 명절이 되기를, 우리 모두 서로를 좋아하진 않지만 싫어하지는 않는 사이가 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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