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니 Jan 30. 2023

그럴 때가 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몸이 찌뿌둥하고 은근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나도 모르게 미간에 인상이 퐉 써져서 내 천자가 얼굴에 박혀 있을 때. 이런 날은 그저 조용조용 하루를 보내고 싶은데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선 그게 참 쉽지 않다. 하필 아이는 내 컨디션이 안 좋을 때마다 유달리 말을 듣지 않는다.


오늘도 그랬다. 등원 차량이 오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아이는 세월아 네월아 드러누워서 양말 한 짝조차 신지 않았다. 억지로 옷을 입히고 양말만이라도 스스로 신어라고 일부러 놔뒀는데 10분 동안 양말 한 짝을 안 신다니. 평소라면 그래 내가 그냥 신기고 말지, 넘어갔을 일인데 오늘은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 너, 엄마가 양말 신어라고 했어? 안 했어? 너 지금까지 뭐 하고 있는 거야!

- 양말 신으려고 했어! 했다고! 근데 엄마가 그래서 더 양말 신기 싫어!


아이는 보란 듯이 냅다 양말을 나를 향해 던져 버렸고 나는 그 순간 만화처럼 머리 뚜껑이 열리며 아이에게 똑같이 양말을 집어던졌다.


-너! 어디서 엄마한테 양말 집어던져! 어디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해 아이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 순간에도 버스 시간에 늦을까 화를 내면서도 눈동자는 시계에 박혀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우는 아이의 발에 억지로 양말을 신기고 신발을 구겨 넣은 뒤, 가까스로 집을 나섰다. 그러자 아이가 울면서 "엄마 쉬야 마려워." 소리쳤다. 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왔는데.

하아.

그래, 이런 날이 꼭 있다. 뭐가 안 풀리는 날.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서 볼일을 보고 난 뒤, 아이는 다행히 늦지 않게 유치원 버스에 탔고 나는 어색하게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미니하트를 건넸다. 아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미니하트를 해줬다.


버스가 떠나가자마자 이유 모를 홀가분함과 함께 뒤늦은 후회가 불쑥 올라왔다. 그렇게 짜증 내지 말걸. 그냥 내가 양말 신겨줄걸. 집 나오기 전에 한 번 더 화장실 안 가고 싶냐 물어볼걸. 5분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너무 미워서 아휴 아휴 한숨을 쉬었는데, 막상 아이가 사라지니 아이에게 못 해줬던 것만 떠올랐다.


하원 시간이 다가오자 그래, 더 이상 아이한테 짜증 내지 말아야지. 혼자서 다짐 또 다짐을 하며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 반가운지 아이도 나를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풀썩 나를 안아줬다. 둘이서 맛있는 초코도넛도 사 먹고 우유도 마시고,

마트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요구르트도 사서 돌아오는 길, 나는 이제 지쳐서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아이는 또 요리조리 샛길로 들어갔다.


-혜민아, 엄마 힘든데 집에 이제 들어가자. 집에 가서 놀자.

-싫어 싫어, 나 여기서 달리기 할 거야.


아이는 근처 초등학교로 쏙 들어가 버렸고 나는 한쪽 어깨엔 아이의 가방, 다른 한쪽 어깨엔 마트에서 장 본 것들을 메고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에너지가 넘치는 5살 아이는 운동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나에게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몇 번 함께 달리기를 하다 보니 나는 이내 지쳤고 아이는 그런 나를 향해 계속 뛰자고 소리쳤다. 컨디션이 별로인데 뜀박질을 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현타가 밀려왔다. 나는 이제 아이에게 집으로 가자고 사정하기 시작하였다.

-혜민아, 이제 많이 뛰었는데 집에 가자. 옆에 형아들이 야구도 하고 있어서 엄마 공 맞을까 무서워.

-아니야, 괜찮아. 같이 뛰어도 돼.


나는 분명히 집에 가자고 하는데 왜 아이는 계속 괜찮다는 말만 하는 걸까. 내 말을 무시하는 아이에게 점점 짜증이 났다. 분명 하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늘만큼은 아이가 원하는 건 다 해주자 백번 다짐하였는데. 아이를 만나고 고작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약속은 야속하게 깨져버렸다.  나는 짐짓 화난 말투로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너무 힘들어. 너 계속 달리기 할 거면 엄마 먼저 집에 갈게. 넌 따라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일부러 나가 가려고 하자 아이는 또 울음을 터뜨렸다. 왜 엄마는 엄마 마음대로 하냐며 엄마는 말썽꾸러기라고 하였다. 아이가 쓸 수 있는 가장 큰 욕(?)이자 기분 나쁜 표시였다. 우는 아이를 무시하고 운동장을 나가자 아이가 울면서 따라왔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아이를 무시하고 앞서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아이에게도 화가 나고 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 자리에 없는 남편에게도 화가 났다(?).


우는 아이를 억지로 씻기고 저녁을 먹이고 있으니 남편이 돌아왔다. 얼른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나의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아이와 조금 떨어져 있고 싶었다. 안방에 들어와 핸드폰을 하고 있으니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져 바라보니 아이가 안방 문을 빼꼼히 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의 잠을 재우는 시간, 아이를 품에 꼭 껴안고 엄마가 오늘 몸과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혜민이에게 많이 화낸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자 아이는 나에게 혜민이는 우주가 터질 만큼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종일 다투기만 하였는데 왜 이 아이는 나를 그토록 사랑해 줄까. 작고 여린 아이에게 짜증만 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괜히 잠든 아이의 손을 한참 매만지다 방을 나왔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든 날은 오늘처럼 나의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데 아이의 요구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할 때인 것 같다. 평상시라면 받아줄 수 있는 것도 내 컨디션이 안 좋으니 더 힘들게 받게 되고 그 화가 다시 아이에게 향하니 나의 안 좋은 기운이 아이에게 갈까 봐 너무 무섭다.

늘 나에게 짜증 내고 화냈던 엄마를 보면서 나는 절대 아이에게 함부로 화를 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엄마와 같은 표정으로 화를 낼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나에게 말해준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고. 엄마도 사람이니까 그런 순간이 있다고. 그래, 그럴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있다. 내 마음도 내가 어쩌지 못해 혼란스러운 날.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이 무거운 마음을 삭히고 싶은 날. 엄마도 사람이니까 그런 날이 있다. 그때마다 나에게 매일 엄마를 우주가 터질 만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이가 있다는 걸 기억해야지. 나를 이토록 사랑해 주는 작은 아이를 위해 힘을 내야지. 잠들기 전 눈을 감고 아이의 손을 만지며 기억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가까워질 수 없는 우리 사이, 고부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