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니 Nov 02. 2023

엄마를 포기하였다

  

  요 근래 아이가 자주 아팠다. 9월에 A형 독감을 걸린 이후 잔잔하게 감기기운이 있더니 10월 말에는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할 정도였다. 아이가 아프자 자연스레 나도 힘들어졌다. 남편은 늘 언제나 바쁘기에 (당연히 회사를 다니고 돈 버는 것도 힘들다) 아픈 아이를 보는 일은 역시나 나의 일이었고 큰 아동병원이 없는 동네에 살았기에 나는 아픈 아이와 함께 택시를 타고 병원을 자주 왔다 갔다 하였다.


6살 아이가 카시트 없이 택시를 타고 먼 거리를 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아이는 쉽게 멀미를 하였고 멀미를 하다 보면 토할 모션을 취하였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한지. 그렇게 어렵게 소아과를 데리고 가면 또 기본 1시간을 기다렸고 그러다 보면 아이도 나도 너무 지쳐서 힘든 몸을 이끌고 또 택시를 기다렸다.


그렇게 2주를 보내다 아이는 끝내 폐렴이 걸려 입원을 하였고 놀랍게도! 독감이 나은 지 한 달 만에 독감에 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뭐, 자식 키우면서 입원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고 아이가 6살이 되었기에 애가 입원 한다고 해서 죽을 것처럼 힘들고 이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힘은 들었다.


왜냐면 나도 아이와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나도 독감이 자연스럽게 (?) 걸렸고 그러다 보니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기분이 하루 종일 이어졌기 때문이다. (역시나 남편은 바빠서 없었다.)

거기다 아이가 항생제 부작용으로 계속 자기도 모르게 팬티에 설사를 해대는데 나는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의 설사 팬티를 매번 빨아야 했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아무리 귀엽고 예쁜 내 새끼라도 설사 팬티는 비위가 상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아이의 팬티에 내 팬티라이너를 붙여주며 불편하더라도 이거 좀 하고 있자고 사정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입원생활을 하다 드디어 퇴원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과 정신은 너덜너덜하였지만 내 정신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아직 아이의 폐가 좋지 않았고, 배도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재입원을 할 수 있다는 염려를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사실 엄마에게 아이가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먼저 전한 것은 나였다.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는데 달리 생각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로서, 나보다 아이를 먼저 키워 본 선배 엄마로서,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말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무척 달랐었다.


- 아를 (애를) 키우다 보면 다 아플 때가 있다. 내가 우리 주원이 (엄마가 키워 준 친정조카) 키우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내는 말이다~


엄마에게 있어 딸인 나의 고생과 손자의 아픔, 그리고 딸의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아무것도 아닌 게 느껴졌다. 그저 엄마가 홀로 손자를 키워 낸 자부심 (엄마는 6년 동안 친정 오빠네 아들을 키워줬다) 할머니는 강하다는 자아도취, 그리고 그 정도에 힘들어하는 젊은 나에 대한 꾸짖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엄마의 고생담과 자랑을 한 20여 분 듣자 나는 이내 힘들어졌고 그 이후로 엄마에게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해 봤자 좋은 소리 듣지 못할게 뻔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엄마가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건 것이다.


아이가 퇴원을 하였지만 아직 좋지 않다. 다시 재입원을 할 수 있다. 남편이 오늘밖에 반차를 못 써서 어쩔 수 없이 지금 퇴원했다. 나도 독감 기운이 있다. 뭐 이런저런 나의 하소연을 하려는데 엄마는 무엇이 그리 화가 났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 아 (애)가 중요하지! 네가 뭐 고생하는데 아(애) 를 그리 일찍 퇴원시키노! 니가 그러고도 엄마가! 내가 아 키울 때는 혼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파티마 병원으로 가고 그랬는데! 니는 고작 택시 타는 게 힘들어서 아를 퇴원 시키나!


엄마의 신경질적인 잔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나는 점점 힘이 들었다. 퇴원을 하고 오자마자 남편은 바로 회사를 갔고 나는 혼자 아이에게 줄 국을 만들고 산처럼 쌓여있는 빨래를 부랴부랴 한다고 자리에 한 번 앉아 있지도 못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내가 할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는 걸 알기에 달리 미적거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친정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내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줄 알았다. 왜냐면 같은 여자이고, 같은 엄마니까. 그러나 엄마는 역시나 내 예상을 완전히 빗겨 난 것이다.


-엄마, 애도 애지만 내가 지금 너무 아파. 애한테 독감 옮았나 봐.

-뭐, 그래서 어쩌라고? 엄마는 원래 아프다. 니 때문에 주서방 감기 옮으면 안 되니까 마스크나 잘 쓰고 있어라. 애나 밥 잘 챙겨주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이제 정말 엄마를 포기해야 함을. 나를 낳고 키웠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님을. 역시나 나는 그저 엄마에게 가장 함부로 대해도 되는 만만한 딸임을.


엄마에게 더 이상 엄마와 통화하고 싶지 않으니 전화를 끊으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오히려 마음은 차가워졌다. 사실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놀랍지도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엄마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정말 엄마를 내 마음에서 놓아야 함을 느꼈다.


저번 추석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없었다. 엄마도 엄마의 시댁에 간 것이다. 한 두어 시간을 기다리니 엄마와 아빠가 왔다.


나는 반가워서 “엄마!”라고 불렀지만 엄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왜 밥도 안 먹고 왔냐며 화를 바락 냈다. 그러고는 나에게 강아지 물은 왜 안 챙겨줬냐, 너는 지금까지 뭐 했냐 등등 짜증을 내며 눈치를 줬다. 남편과 나는 엄마의 눈치를 봤고 저녁만 후딱 먹고는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엄마가 짜증 난 이유는 피곤하고 배가 고팠기 때문임을 후에 들었다.


그렇다. 나는 엄마에게 늘 그런 딸이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친정 오빠가 수능을 망쳐서 대학에 모두 떨어졌을 때도 엄만 오빠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나에겐 짜증을 미친 듯이 냈고, 오빠가 결혼을 준비할 때 엄마에게 돈을 더 달라고 징징 거릴 때도 속상한 마음을 나에게 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의 짜증과 한풀이를 모두 들어줬다. 왜냐면 나는 착한 딸이고, 내가 그렇게 해야 엄마가 나를 좋아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라도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는 오빠와 달리 나는 이쁨 받을 짓을 해야만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작은 어린이가 아니다. 이제 나는 나만의 가족이 있고 특히나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나를 상처 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되고 싶지 않으려 한다. 맞지 않는 친구가 있으면 조금씩 거리를 두다가 인연을 자연스레 끊듯이 나도 그렇게 엄마와 조금씩 거리를 두다가 자연스레 멀어지고 싶다.


아마 힘들 것이다. 그래도 나를 낳아주고 키워 준 사람인데. 무려 엄마인데. 어떻게 쉽게 멀어지겠는가.

하지만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 내가 아이에게 이토록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이유도 아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너무 벅차도록 커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이런 나의 사랑이 너무나 가볍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것 같기에 나의 일방통행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의 짝사랑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렇다. 나는 엄마를 이제 포기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를 잃어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