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먹지 않으면 생각나는 된장찌개나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는 그리움의 근원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놀이에 정신 팔렸던 나를 부르던 ‘밥 먹어라’하던 엄마의 목소리, 집으로 달려가던 꼬맹이 코에 구수하게 들어오던 국 냄새가 있었다. 빙 둘러앉아서 어른들은 밭에서 막 뜯은 상추와 찐 호박잎에 밥과 강된장을 얹어서 입이 미어지게 넣고 날된장에 풋고추를 푹 찍어서 먹었다. 그런 밥상에 내가 께적거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름날의 평화로운 기억이다.
한겨울 뜨끈한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청국장과 메주 띄우는 쿰쿰한 냄새로 코를 싸매다가도 방구석에서 키운 노란 움파를 넣고 화로에서 끓인 찌개를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은 냄새로만 기억하는 특별한 청국장엔 외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녹아있다.
시댁에 인사하러 가서 처음으로 먹었던 밥상에 막장 찌개가 올랐다. 너무 맛있게 먹으니 ‘넌 우리 식구다’ 하고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과 갓 시집온 새댁이 끓인 된장찌개를 칭찬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있다. 그중 내가 힘이 들거나 어려울 때 가끔 기억나는 특별한 된장국이 있으니 그건 늘 마가린과 함께이다.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곳이 공장과 기숙사가 함께 있는 직물공장의 사무실이었다. 공장의 규모는 작았지만, 그곳에서 무늬도 넣어서 직물을 짜고 염색도 했으니 전문기술자부터 나이 어린 견습공까지 150여 명이 근무했다. 대구에서 큰 공장을 운영한다는 두 형님과 함께 사장님의 삼 형제가 모두 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수출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나도 점심은 회사 식당에서 먹었는데 우리는 밥값을 내지 않았지만, 기숙사에서 사는 직원들은 월급에서 밥값을 조금씩 공제했다. 직원들의 복지가 엉망이었던 그 시절, 식당 밥은 깍두기나 배추김치에 다른 반찬 한 가지와 국이었는데 국은 거의 매일 된장국이었다.
커다란 가마솥을 몇 개 걸어 놓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데 별다른 재료를 넣는 것도 아닌데 굵은 멸치만 들어간 국물에 우거지를 넣고 끓인 국은 시원하고 구수했다. 어쩌다가 소고기가 들어간 국을 회사 식당에서 끓이는 날이면 식당 밥이 싫다고 바깥 식당에서 사 먹던 사람들까지 몰려들어서 금세 동나기도 했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이 식당에 오면서 뭔가를 가지고 오기에 보니 바로 마가린이었다. 그 걸로 밥을 비비기도 했지만 대부분 된장국에 마가린을 한 숟가락 퍼서 넣는 것이었다. 그네들이 부족한 기름기를 섭취하는 방법이었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참 잘해주었는데 어느 날은 가마솥에서 긁어낸 누룽지를 건네기도 하고 괜찮다고 사양을 해도 마가린을 한 숟갈 퍼서 내 국그릇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게 나에게 주는 그분들의 마음인 것을 알아서 기름이 둥둥 뜨는 국을 말없이 먹었다.
복날 무렵이면 사장님은 직원들을 위해 특별한 복달임 상을 준비했는데 붕장어(아나고)회였다. 신선한 회를 위해 사장님의 단골식당 조리사가 직접 와서 공장 마당에 친 천막에서 붕장어를 손질했다. 그 자리에서 살아있는 붕장어를 못으로 고정하고 껍질을 벗긴 뒤 잘게 썰어주면 보조하는 사람이 헝겊에 비틀 듯 짜서 접시에 놓았다.
지금과는 달리 비위가 무척 약했던 나는 우연히 그 광경을 보고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붕장어 회를 한 점도 먹지 못했다. 바닷가가 고향인 직원들은 환성을 지르면서 상추에 회를 싸서 먹었지만, 나처럼 생선회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한참 먹는 것에 주려있던 아이들은 주저하면서도 권하는 대로 먹었고 다음 날은 화장실에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다. 매일 된장국을 먹던 아이들이니 배가 놀랐는지도 모른다. 비싼 재료에 조리사까지 직접 왔으니 비용이 꽤 들어간 것도 사장님의 배려였건만, 정말로 배고픈 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효과적인 회식은 아니었던 듯하다.
2년 만에 그곳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에 취직하고 나서도 복날이면 천막 아래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붕장어회가 차려진 상이 떠오른다. 그와 함께 된장국에 마가린을 넣던 수출산업의 역군이었던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도 함께다. 그 애들도 나처럼 아들딸 낳고 늙어가겠지. 모든 것이 풍족한 요즘 아이들은 형편이 어려워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서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해줘도 이해 못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