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와 무를 납작하게 썰어서 냄비에 담고 참기름을 한 방울 떨군 뒤 볶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여고 때 국어 선생님께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소천하셨다는 소식이었다. 황망한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얼마나 허둥거렸는지, 그만 국물을 엉뚱한데다 부어서 흘려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허둥거리면서 끓였던 소고기뭇국은 아무 맛도 없었다.
선생님 젊었던 때의 모습을 뵙는 듯한 착각이 잠시 들었을 만큼 똑 닮은 아드님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입시도 중요하지만 꿈을 잃으면 안 된다며 수업 시간에 영화 이야기며 시(詩)며 소설의 한 대목을 말씀해주시던 선생님은, 감성적인 성정으로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사모님을 힘들게 했다. 게다가 긴 세월을 당뇨로 고생을 하시면서 한쪽 시력을 완전히 잃어 교편생활도 접은 지 오래됐다. 이번에 간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열흘 만에 떠나셨다고 했다.
사모님께선 이젠 아무 걱정 없이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총총 가신 것이 너무 아깝다고 하셨다. 몇 해 전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뵙고 한번 찾아뵙겠노라고 했는데,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그러질 못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살림하면서 글도 쓰고 해마다 책도 냈다면서 너무 기특하다고 좋아하셨다고 전하신다. 언젠가 내가 동인 수필집을 보내드렸더니 잘 받았다며 “이제 너도 개인 수필집을 내야지. 내가 기다리마.”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려왔다.
많이 늙어버린 사모님께선 많이 망설이다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면서 오래전 제자들이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다. 여고 시절 철없는 우리는 우르르 선생님의 신혼집으로 몰려갔다. 그때마다 사모님께선 맛있는 밥을 해주셨는데 소고기뭇국도 종종 끓여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그때 너무 철이 없었노라고 말씀드리자 부자인 친정에서 먹을 것을 보내주어서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노라고 하셨다. 사모님께선 우리에게 그때처럼 자꾸만 이것저것 먹으라고 권하신다.
나에게 소고기뭇국은 외할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음식이다. 동짓달 외할머니의 생신날이면 매서운 추위가 닥쳐왔다. 날이 좀 수그러졌다가도 찬 바람이 몰아치고, 물이 조금이라도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들러붙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보면 커다란 가마솥엔 소고기를 넣은 뭇국이 설설 끓고 작은 가마솥에선 밥이 김을 뿜었다. 방 한구석에서 할머니가 물을 주어 기른 콩나물을 삶아서 커다란 양푼에다 무치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고 메밀 묵무침이며 무를 넣은 북어조림도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바람을 막기 위해 마당에 세운 천막 작은 구멍에선 바람이 들락거리고 마당에 길게 놓인 상을 행주로 닦으면 행주가 상에 붙어버리곤 했다. 이쪽에다 반찬 그릇을 놓으면 저쪽으로 주르르 미끄럼을 탔다.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들어선 동네 남자들은 천막이 쳐진 마당에 자리를 잡고 여인네들은 방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얼추 동네 사람들이 식사를 마칠 시간이면 동네 끝에 살던 거지 부섭이 아저씨가 가족들을 이끌고 쑥스럽게 웃으며 대문을 들어섰다. “저 넘의 인간은 날짜도 안 잊어버리네.” 옆집 친구 엄마가 구시렁거리면서도 국을 푸고 빠진 반찬을 챙겼다.
누구넨 두부를 해오고 누구는 달걀을 한 꾸러미 들고 오고, 누군 들기름을 가져오던 풍경은 내가 그곳을 떠나기 전 해마다 접했던 기억들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바뀌고 들고 오는 선물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빠짐에 따라 아침 대신 저녁을 먹기도 했지만, 아흔둘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머니의 생신은 늘 푸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먹거리가 풍성해지면서 더는 소고기뭇국이 생신날에나 먹는 귀한 국이 아니게 되었지만, 외할머니 생신날이면 먹었던 것과 같은 국을 시어머니 상중(喪中)에 먹었다. 장례식장에선 아무래도 육개장이 나을 것 같은데, 이곳 소고기뭇국도 맛있으니 한번 바꿔보라고 권해주었다. 시원하긴 하지만 밍밍할 것 같아서 망설였다. 입이 깔깔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칼칼한 게 한 그릇을 다 먹었을 만큼 맛있었다. 장례식장 음식이라는 선입견을 바꿔준 국이었다. 소고기뭇국을 포함해서 음식이 맛있다고 대부분 문상객이 말하는 것이 생전에 남들에게 밥 먹이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님의 뜻이려니 싶었다.
선생님 문상을 다녀오면서 외할머니도 시어머니도 그립단 생각을 했다. 오래전 사모님이 끓여주셨던 소고기뭇국이 떠올라서 그럴 것이다. 아무래도 코끝이 맹맹한 것이 감기가 오려나 보다. 아침에 끓인 국에 후춧가루를 듬뿍 쳐서 뜨끈하게 한 그릇 먹어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