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여기 앉아라”
“엄마도 여기 같이 앉아요”
아이와 대중교통을 타면 자리를 양보해주시는 분들은 어김없이 “아줌마”다.
아무리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굳이굳이 앉으라고 하신다. 아이에게 뭐 하나 주고 싶으셔서 가방에 뭐 없나 뒤적거리시기도, 몇 살인지 물어보시기도, 지긋이 아이를 바라봐주시기로 한다.
아이들을 낳은 이후, 난 “아줌마”들이 좋아졌다. “아줌마”들에겐 아이를 낳아 길러본 경력자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대중교통에서 쉽사리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이유도 아이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온몸으로 느껴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과하게 수다스럽고, 서슴없는 이야기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우리 엄마 생각,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면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니 나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지칭할 때가 더러 있다. "아줌마"라는 말 외에는 제3자에게 나를 지칭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가씨 때는 “아줌마”가 좋지 않았다. 그 단어도 싫었고 그 어감이 주는 분위기도 싫었다.
“아줌마”란 말을 들을 때마다 시장에서 가격을 무리하게 깍는 억척스러움, 원래 알았던 사람처럼 농담을 건네는 주책스러움, 큰 목소리 덕분에 안 듣고 싶은 이야기도 들리게 하는 시끄러움, 아무리 안된다 해도 되게 해 달라고 박박 우기는 억지스러움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아줌마"가 되고 나니, 식구들을 위해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는 성실함,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는지 공유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대화들, 제어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가끔은 필요한 훈육의 목소리, 아이에게 좀더 나은 것이 있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해보는 용감함이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였던 시절, 허리도 안좋으면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엄마를 타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줌마"가 되니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방이 늘 무겁다. 아이들이 뭘 찾을지 모르고, 혹시나 필요하지 않을까 마음에 이것저것을 넣다보니 항상 가방이 묵직해진다. 가방의 무게가 사랑의 무게였음을 결코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야?” 아이들 진료를 마치고 병원에서 나오는 길 진료를 기다리던 옆의 아줌마와 대화를 하는 걸 본 남편이 물었다. 나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 처음봤는데!!”
"아줌마"가 되니 처음보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나와 같은 처지의 아줌마들을 만나게 되면 술술 말이 나온다. 아이가 얼마나 말을 안 듣는지, 얼마나 밥을 안 먹는지, 얼마나 자주 아픈지, 얼마나 잠을 안 자는지를 나누다 보면 강한 전우애가 들어 금새 웃음꽃이 핀다.
회식 후 알딸딸한 상태로 탄 택시에서 기사님이 아들딸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래저래 대응을 해드리다가 문득 질문을 했다.
“기사님, 제가 딸이 둘 있는데요 아이들 키우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잘한거겠죠?”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대한 기사님의 위로에 눈이 금새 그렁그렁해졌다.
“그럼요, 아이 낳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요, 그거 아무나 하는거 아니예요, 너무 잘한일이예요, 잘하고 있어요”
기사님이 자녀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이름 모를 나에게 저렇게 따뜻한 응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아줌마”는 비단 real 아줌마뿐 아니라 세상에 자녀를 키워본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기사님과의 에피소드를 "아줌마"인 나의 친구에게 전달하니 택시안의 나처럼 눈시울이 붉어진다.
원래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아줌마가 되면서 감성적이게 변한 걸까! 예전보다 느끼는 감정의 개수가 늘어난 탓일까, 나도 "아줌마"가 되니 창피하게 장소불문 울기도 잘 운다.
그래도, 인정하기 싫어도, 난 "아줌마"가 되었고, "아줌마"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