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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조각
별생각 없이 살고 있다.
촘촘히 세워둔 계획이
하나둘 박살 나
정신차리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산산조각 난 계획을 줍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화낼 시간도 없다.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불가능 속에서 가능한 길을 찾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반복한다.
마치 소설 《그날, 그곳에서》처럼.
지난 과오를 반복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죽음뿐이다.
시간에 쫓기며 사는 데에는 취미가 없는데.
어째서 매번 이리도 숨 막히게 쫓기는지.
웃을 일도 없고 그렇다고 울 일도 없지만,
기왕이면 무탈하고, 평안하고 싶다.
매일 마주하는 누군가의 죽음과 분노,
무혐의와 집행유예, 물가 상승, 전쟁, 멸종….
아직 내가 인간이긴 한지,
나 또한 짐승만도 못한 이가 된 건 아닌지,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혼란스럽고 괴롭다.
와중에 공과금은 언제부터 거진 매달, 매 분기에
올랐는지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는 심정.
지쳐 있는 상태에서는 항상
다른 무엇보다 자신부터 포기하게 되고,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하루치 운동을 취소할 예정이다.
어제 퇴근하면서는 마스크를 놓고 오고,
오늘 퇴근하면서는 장화의 짝을 바꿔 신었다.
안쪽과 바깥쪽, 왼쪽과 오른쪽이
뒤엉킨 장화가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위로를 받는다.
by 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