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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Dec 27. 2023

엄마의 고추장

택배가 도착했다. 고추장이다. 이번에 산 고추장은 맛이 어떨는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입에 꼭 맞는 고추장을 찾아내기 위해 매번 다른 회사의 고추장을 구입하고 있다. 꼼꼼하게 포장된 박스를 열고, 테이프를 뜯어내고 뚜껑을 열고, 종이 덮개를 뜯어서 고추장의 색깔과 냄새를 확인했다. 고만고만할 것 같은 고추장의 색깔들은 거무튀튀한 것부터 밝은 적색까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점도도 조금씩 다르다. 어떤 것은 딱 봐도 윤기가 흐르거나 찰진 느낌이 드는가 하면, 어떤 것은 되직하거나 퍽퍽한 느낌이 든다. 고춧가루 외 부재료는 찹쌀인지 멥쌀인지, 혹은 보리쌀인지, 물엿이나 조청은 얼마의 비율로 들어갔는지 등에 따라 모양과 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번 것은 너무 찰져 보이지도 않고 고운 적색이어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을 보았다. 음~ 이 맛은? 간은 적당하고 맵기도 적당하다. 사 먹는 고추장이 대체로 짠 편인데 이 정도면 봐줄 만하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고추장 맛에 숙성된 느낌이 부족했다. 덜 익은 사과를 먹는 느낌이랄까? 당장 먹기에는 좀 아쉬운 맛이었다. 숙성을 충분히 시키지 않고 판매를 한 것일까? 아무래도 다음에는 다른 상표의 고추장을 사봐야겠다. 국내산 식재료로 만든 질 좋은 고추장을 사기 위해 상당히 비싼 값을 감수하고 사는데도 입에 딱 맞게 마음에 드는 고추장을 찾기가 어렵다. 몇 번 더 다른 제품을 사 보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고추장에 정착할 생각이다.      


내가 이렇게 고추장을 고르는 기준이 까다로워진 이유는 다 엄마 탓이다. 시판 고추장에서 엄마의 고추장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추장 아까운 줄 모르고 마음껏 먹었었다. 한 번도 시판 고추장을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시골에 계신 엄마가 해마다 직접 고추장을 담가서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엄마의 고추장은 너무 찰지지도 않고, 너무 짜지도 않고 마침맞게 맛이 참 좋았다. 비빔밥용 고추장을 만들거나 생야채를 찍어먹을 때 특히 더 맛있었다. 그런데 5년쯤 전인가 그해 겨울, 엄마는 5리터가량 되는 큰 플라스틱 용기 네 개에다가 고추장을 가득 담아서 아주 꼼꼼하게 포장을 해서 보내주셨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무슨 고추장을 이렇게 많이 담아서 보냈느냐고 전화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엄마 말씀이, 힘들어서 더 이상은 고추장을 못 만들 것 같아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잔뜩 만들어서 보내주셨다는 것이었다. 그때 엄마 나이가 80대 중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수긍이 가면서도 서운한 마음과, 엄마의 사랑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울컥해서 "이 정도면 몇 년 실컷 먹겠네, 엄마 고마워"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후 시골에 내려갔을 적에 나는  "엄마, 고추장 만드는 방법 좀 알려주면 안 돼?" 하고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남편이 엄마의 장 만드는 비법을 배워두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나기도 했고, 엄마의 비법을 배워서 내가 직접 장을 담그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추장 못지않게 맛있는 된장 만드는 비법도 궁금했다. 하지만 엄마는 특유의 퉁명거리는 목소리로, "사 먹으면 되지, 뭐 하러 고생스럽게 만들어먹어!" 하고 말씀하시며 비법을 알려주기를 거절하셨다. 막내딸이 고추장 만드느라 고생하는 것이 싫으셨던 거다. 나는 그 사랑이 고마우면서도 '그래도 방법은 좀 알려주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보내주신 고추장은 아끼지 않고 마음껏 먹었는데도 3년 넘게 실컷 먹었다. 마지막 통이 남았을 때 어찌나 서운하던지 이 통은 그냥 먹지 말고 보관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 통은 아껴 먹었는데, 나중에는 조금 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둘러 다 먹어버렸다.  엄마의 말씀처럼 그 후에는 더 이상 엄마의 고추장은 받아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고, 혼자서 생활하시는 것도 힘들어지셨기 때문이다.


엄마의 고추장이 다 사라진 뒤에는 어쩔 수 없이 고추장을 사 먹어야 했는데, 검색해 보니,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추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업체가 상당히 많았다. 그중 엄마의 맛과 비슷할 것 같은 고추장을 찾기 위하여 이곳, 저곳, 한 군데씩 사서 먹어보고 있는데 아직 엄마의 고추장맛에 근접한 곳은 찾지 못했다. 엄마에게 받아먹을 때는 몰랐는데, 백 프로 국내산 재료를 사용하는 고추장은 생각보다 가격이 많이 비쌌다. 엄마의 정성이 담긴 고추장을 돈으로 어찌 환산할 수 있을까마는 굳이 따져보자면 엄마가 매번 보내주셨던 고추장을 시중에서 사려면 상당히 비싼 값을 치렀어야 하는 것이었다.   고추장 값이 비싸다 보니, 아껴 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고추장, 된장 만드는 비법을 듣고 싶은데, 요양원에 계신 엄마는 의사소통하기도 힘들 정도로 안 좋아지셔서 아마도 장 담그는 방법도 다 잊으셨을 것이다. 삶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서서히 약해져 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 인생의 끝도 그와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욱 슬프고 참담한 심정이다. 엄마의 사랑의 상징처럼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는 엄마의 고추장을 오늘도 그리워하며, 엄마를 향한 애잔함을 글로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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