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율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사귀던 애인을 데려간 적 있다. 그저 갑자기 가보고 싶어졌고 어색한 그 나들이를 함께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손가락을 힘껏 뻗으며 여기가 내가 살던 곳이야, 여긴 다니던 초등학교야, 여기서 피카츄 돈가스를 사 먹었어. 아, 그때 엄청 까불던 친구가 있었는데!(그 친구 이야기로 최소 5분) 우와아, 여기가 아직 남아있다니!(추억 소환 최소 10분) 새삼 아빠나 어른들이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그 추억 팔이가 얼마나 재밌는지 깨닫는다.
사람들은 어쩌다 우연히 지나던 길이라도 그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말이 많아져 버린다. 그런데 당사자는 한껏 들뜨거나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그 공간들을 바라보더라도 사실 동행인 입장에서는 별다를 것 없는 거리, 감흥 없는 공간들이다. 나도 예전 단골 음반가게에서 메탈리카 CD를 산 일을 열띠게 설명했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그럴 적에는 좀 시큰둥하게 맞장구를 쳐준 것처럼.(갑자기 미안해진다) 앞으로는 아쉬워도 1절만 하고 돌아서는 게 좋겠다. 아니면 그곳을 함께 나누었던 옛 친구를 물색하거나.
많은 이를 받아들이던 공간들은 애틋한 기별도 하지 않고 훌쩍 사라져 버린다. 나는 오랜 시간 그곳들을 잊고 지낸 주제에 뒤늦게 찾아가서 뻔뻔하게 군다. 아이참 여긴 언제 없어진 거야? 정말 아쉬워. 진작 와볼걸. 반대로 오래된 장소가 갑자기 나 여기 있었잖아,라며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나타나면 반가움과 묘한 안도감에 괜히 눈길로 공간을 더 어루만지게 된다.
을지면옥이 사라지다니! 오비 베어도 떠나게 되었고 양미옥은 불이 난 후 남대문 즈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을지로 3가를 몇십 년 지켜오던 곳들이 사라진 만큼 반대로 새로 생겨나는 곳들도 많다. 오래된 인쇄소들, 창고나 제지소였던 골목들이 밤까지 사람들로 활기차다. 젊은이들은 내추럴 와인이나 칵테일을 파는 가게로 쑤욱 사라진다. 어른들은 익숙한 노포를 찾아가다가 새로운 가게들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나이를 막론하고 골목의 야외 포장마차에서 큰소리로 떠들고 있다. 나도 그 활기 있는 웨이브에 올라타서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돌아다니게 된다. 구 도심이 간직해온 허름한 낭만은 묵혀온 만큼 더 진하고 뭉근하니까.
평균율은 숨어들기 좋은 곳이다. 메뉴판에 목소리를 낮춰달라는 당부가 있지만 그만큼 목소리들이 머물다 가기 좋다는 이야기. 친구들과 음악소리에 숨길 만한 이야기를 낄낄대기 좋고, 애인과 괜히 뺨을 가까이하며 속삭이기도 좋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단정하고 아늑한 공간이다. 무엇보다도 시선을 사로잡는 건 가게의 창문을 꽉 채우는 바깥의 가로수다. 풍성한 잎사귀가 시야를 흠뻑 녹색으로 채운다. 술잔에서 고개를 들고 나뭇잎이 몸을 떨듯 찰랑대는 걸 보며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시는 즐거움. 옆자리의 조조와 간간이 떠오르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작은 여행을 떠나온 기분마저 든다. 아, 이 도시는 어디에 있는 곳일까.
-장르 : 다양하지만 주로 Jazz
-볼륨 : 대화가 편안한 정도
-플레이 포맷 : vinyl, cd
-신청곡 : 불가
-서울 중구 충무로4길 3 자미당 건물 2층
-02-2275-9249
-매달 1,3,5번째 일요일 휴무
<JoJo’s comment>
골목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을지로 3가. 아세아 약국 골목으로 가자. 주의 깊게 둘러보면 조그맣게 반짝이는 평균율의 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낮에는 카페, 밤에는 bar로 운영된다. 대체로 재즈가 플레이 되는 차분한 분위기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손님이 많고 밤이 깊어져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조금 격렬한 재즈가 흘러나오기도. 간단하지만 맛있는 음식들이 있으니 빈속에 술 마시지 말고 안주를 주문해 보자. 더불어 큰 창으로 보이는 가로수는 계절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안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