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만족이지.
“어머, 선생님 배 고팠어?”
예상치 못하게 날아든 말에 식판에서 고개를 든다.
다른 부서 선생님이 밥과 반찬을 한가득 담은 식판을 들고 내 옆에 서 있다.
“아……”
내가 식탐을 부렸나 싶은 마음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식사를 거의 마친 내 식판에는 한 술 정도의 밥과 바닥을 드러낸 국 그릇,
양념만 남은 반찬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자율 배식인 회사 구내식당.
나는 항상 먹을 만큼의 음식만 식판에 덜어온다. 그리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낭비를 싫어하고,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많다니 난 적당량만 덜어온다는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하게 날아든 말에 창피함이 앞서고 말았다.
음식이 남더라도 수북이, 넉넉하게 담아오는 것이 미덕이었던가.
식판의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싹싹 긁어 먹던 내가 어쩐지 욕심 많고, 항상 배고파 보이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퇴근 후 남편에게 말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그게 왜 창피해?”
“식탐 부리는 것처럼 보일까봐.”
“먹을 만큼만 갖고 와서 다 먹는 게 식탐이야? 먹지도 못할 만큼 집어 와서 남기는 게 식탐이지.”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해준다.
오전 근무가 끝나면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또 한편으로는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몰려든다.
배가 고프니 당연히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오죽하면 장을 보러 갈 때도 밥을 먹고 가라고까지 하지 않나.
허기진 배를 잡고 음식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남편과 나지만 어쩐지 이런 일에서는 의기투합이 잘 되는 모양이다.
가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찾는 한식 뷔페나 결혼식 뷔페, 혹은 일반 뷔페에 가더라도
우리가 앉았던 식탁에는 과일 껍질과 닭 뼈 정도만 남아있을 뿐, 멀쩡한 음식은 없다.
먹고 더 갖고 오면 된다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고, 아이들도 익숙해졌는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운운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중용(中庸)의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슨 음식 남기는 것 가지고 중용까지 들먹이나. 하겠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음식 버리는 것을 아무렇게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것은 아까워할쏘냐.
욕심은 낭비를 낳고, 그런 낭비가 모여서 결코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집 앞 편의점에 가자는 남편의 말에 나는 급하게 에코백을 찾았다.
이런 모습을 몇 번 본 남편이 돈 주고 비닐봉투를 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러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돈도 돈이지만, 그냥 나 혼자 작게 실천하는 환경보호야.”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장바구니를 챙겨가는 억척스러운 아줌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실천하는 환경보호였던 것이다.
다행히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후 내가 에코백을 깜박하기라도 하면 “가방 안 갖고 가?” 라며
챙겨주기까지 했다.
세심함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고 자잘한 것들을 귀찮아하는 남편이었는데.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방법을 모르고 실천까지가 어려워서 그렇지 대부분 환경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남편까지도 환경 보호에 나름 힘을 보태고 있던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겠나.
소소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장을 보러 갈 때 장바구니를 챙기고, 분리수거를 잘 하고.
대체로 자기만족이겠지만 어차피 내 인생 아니겠는가.
개미가 야금야금 음식물을 옮기는 것처럼 나 또한 매일 조금씩 실천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