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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Sep 04. 2024

내 딸은 또래상담사

아, 나 T야.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는 딸이지만 고맙게도 학교 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다.

이제 초등학교 6학년. 그 흔한 영어학원, 수학학원 한 번 다녀 본 적 없는 말괄량이. 

이렇게 말하면 내년에 중학교 가서 어떻게 경쟁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초등학교까지는 즐겁게 학교 생활하면서 공부보다는 재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 덕분에 아직은 학교 가는 것이 재미있는 딸이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딸에게 전화가 온다.

 "엄마! 나 또래상담사 해도 돼?"

 "그게 뭔데?"

 "친구들 상담해 주는 거야. 해도 돼?"

상담이라고? 과연 친구들이 딸한테 상담신청을 할까? 웃음이 났다.

 "너 알아서 해."

 "그럼 한다!"

시간은 흐르고 5학년부터 상담을 시작해서 벌써 1년 넘게 상담사로 활약하고 있다.

뭘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끔 일찍 등교를 하는 날도 있다. 뭐했냐고 물어보면 <학교 폭력 근절>이라는 

피켓을 들고 등교길에 서 있기도 하고, 정말 친구들의 고민을 상담을 해 주는 날도 있다고 한다. 

문득 궁금했다. 친구들이 도대체 무슨 상담 신청을 할까? 


 "하나만 예를 들어서 말해 봐. 무슨 상담 해줬어?"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딸을 보니 정말 상담자가 있긴 한 모양이다.

 "친구가 하나 있는데 또 다른 친구가 있어. 나한테 상담한 친구는 이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이 친구가 인기가 많은 거야. 그래서 얘하고만 놀 수가 없어. 그런데 이 얘는 이 친구랑

베프가 되고 싶어해."

오. 꽤나 난이도가 있는 상담이다. A라는 친구는 B라는 친구와 베프가 되고 싶었는데 B라는 친구는

인기가 많다보니 A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예민한 사춘기 소녀들의 우정에 관한

상담이라니. 그걸 무딘 우리 딸에게?

 "그래서 너 뭐라고 상담해줬는데?"

뭘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딸이 시크하게 대답했다.

 "다른 애랑 놀아."


명쾌하긴 한데 이게 상담이 되는 건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다시 딸에게 묻는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

 "뭐?"

 "다른 상담 해 준 거 없어?"

 "아, 있어! 이번에는 공부."

 "너한테 공부 상담을 했다고?"

 "응!"

 "대체 왜? 왜 너한테 공부 상담을 해?"

 "엄마 나 공부 잘 해."

 "잘한다는 기준이 뭐지? 암튼 말 해 봐."

 "이번에는 남자앤데 학원에서 시험을 봤대.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잘 못 봤대."

 "그걸 생전 공부도 안하는 너한테 물어봤다고?"

 "응."

 "......그래서 뭐라고 상담해줬는데?"

미심쩍다. 미심쩍다. 미심쩍다.

 "공부 더 해."


이게 상담이 되는 건가? 

 "걔네들 뭐라고 해?"

 "알았대."

헐......


놀랍게도 딸의 이런 성향은 나를 닮았다. 처음 MBTI가 유행했을 무렵 아들과 딸이 그렇게 

나에게 검사를 해 보라고 했지만 귀찮아서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둘이 결론을 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엄마는 분명 T야."

그리고나서 엄마는 T라며 놀리기 시작했다. 엥? 그러는 너희는 뭔데?

자랑스럽게 본인들은 F라고 말하는 아이들. 

검사는 안했지만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터라 믿을 수 없었다. 

 "웃기네. 너희 분명 T야.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조금 더 크면 T야. 엄마가 T인데 너희가

F일리 없어."

딸의 상담도 공감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너 F 맞냐?"

 "아니, 나 T야." 

......에? 

 "너 F라며? 엄마 T라고 놀렸잖아."

 "아, 나 T야."


문득 얼마 전 딸내미 친구 어머님과 통화한 내용이 떠 올랐다. 

 "어머니, 예은이는 어쩜 그렇게 어른스러워요?"

 "예은이가요?"

 "네, 지난 달에 지영이 생일파티에 예은이도 왔었잖아요. 친구들이 포카(포토카드)를 쫙 깔아서

자랑하고 있는데 예은이는 포카 없나봐요."

 "네."

 "예은이가 포카가 없으니까 친구들이 하나 준다고 고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예은이가 '됐어. 이런

종이쪼가리 가져서 뭐 해.' 이러던데요? 호호호호."

아...... 그런 일이. 딸이 관심 없어서 포카는 초등학교 저학년 사이에서 유행하는 줄 알았지. 

 "친구들이 자꾸 준다고 고르라고 했나봐요. 그러니까 예은이가 '너 이거 돈 주고 샀어?' 라고 하던데요."

어머님은 깔깔깔 웃는다. 그에 비해 나는 눈만 꿈벅인다. 

집에서는 아직도 아기같은데 나가서 은근 사회생활 잘 하고 있나보네. 그런데 어디에서 들어 본 대사다.


딸이 친구들과 나갔다 집에 오면 가방에는 항상 쓸데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거지?

싶은 물건들. 

 "딸, 이거 돈 주고 샀어?"

 "그럼."

 "뭐하러?"

 "이쁘지?"

단지 예뻐서 샀다며 배시시 웃는 딸. 이쁜 쓰레기를 돈 주고 사왔구나. 한때는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런 일도 적어진다. 키만 가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름 실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인데 딸은 꽤나 심미적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예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지만 예전보다 덜한 것을 보니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가. 

괜시리 흐뭇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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