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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Dec 05. 2022

중년에 읽는 톨스토이 인생론 (3)

1. 인간생활의 근본적 모순

    최근 이전 회사의 직장 상사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하던 도중 그 분의 아버지께서 폐에 혈전이 생겨 응급실에 실려갔으며 큰 수술을 두 번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약간의 후유증이 있고 매일마다 투약 및 걷기 운동을 하면서 상태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위험했던 두 번째의 수술을 앞두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예전 일본 출장 도중 회사의 한 일본인 마케터 분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30대를 지나고 40-50이 되면서 이제는 생명의 기쁨보다는 죽음의 슬픔을 더 많이 맛보고 받아들이게 된다라는 내용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이제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런 시기가 온 것임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요즘 부쩍 늘었다. 자식들과 일 핑계로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한 둘째 아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덧없는 세월의 흐름에 70대 후반을 향해 나아가시는 아버지는 아직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확인을 하며 위안을 얻고 싶으셨던 것일까. 점점 더 쇠퇴해가는 당신의 몸과 건강 상태를 이야기 하시면서,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잠시 동안이나마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잡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육체에 힘이 있고 생명의 기운이 넘쳐날 때, 나는 객관적인 눈으로 타인 그리고 내 자신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불처럼 피어 오르는 나의 자아는 생각을 지배했고 그 결과 나는 자신에게 매우 관대했으며, 타인에게 매우 엄격한 괴물이 되었다. 나의 자아를 만족시키고 실현하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세월이 흘러 육체의 힘이 서서히 빠져가는 것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수 많은 죄를 지어 가면서 톨스토이의 다음 문장들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순간이 오기 시작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행복 달성을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그 행복이 다른 존재에 의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살아있는 것은 모두 자기와 마찬가지로, 항상 자기의 자그마한 행복을 위해서는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인간마저도 포함하는 다른 모든 존재보다 큰 행복은 물론, 그 생명마저 서슴치 않고 빼앗을 각오가 있어야 함을 인정하고 있다... 이 일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가 인생을 이해하는데 유일한 열쇠로 되어 있는 그의 개인적 행복이 그저 쉽사리 얻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서 빼앗겨지리라 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오래 살면 살수록 열락은 점점 그 정도가 감소되고 권태, 포만, 노고, 고뇌가 점점 더 커져감을 더욱 뚜렷이 알게 될 것이다."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부터 나는 기본적으로 착취 구조를 가진 은행/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이 맘에 들지 않았다. 특히 숨만 쉬고 살아도 정부에서 뜯어가는 세금, 은행의 돈놀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부채와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구조를 바꾸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철저히 시스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으로 지금껏 내 인생을 살아오고 있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착취의 결과로 인한 현금흐름의 (-) 부분을 (+) 로 바꿔야 했고 톨스토이가 이야기한 평범한 인간의 방식대로 나는 다른 존재의 행복을 뺏어 나의 행복을 (+) 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여러 해 돈을 모아 작은 집을 구매한 후 이를 통해 월세를 받으며 세입자의 돈을 통해 내가 행복해지는 정석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사용한 재테크의 실천자가 된 것이다. 월세를 싸게 준다든지, 충분한 가치를 제공했다든지, 계약 시 세입자의 편의를 봐준다는 등의 어떤 미사어구를 붙이더라도 결국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의 본질 -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있다' - 은 바뀌지 않는다. 현 20-30대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그들 중 하나에 해당하는 세입자에게서 돈을 받아 주머니를 채우는 또 하나의 모순적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당연히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나의 행복을 (+) 로 만드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그리고 과정 중에 수 많은 리스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처럼 자신의 행복을 (+) 로 만드려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나의 행복은 언제든지 빼앗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된다. 회사 생활이 힘든 것도 마찬가지 이유가 아닌가. 평사원 대비 수십 수백 배의 연봉을 받는 경영진이 아닌 말단 사원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조직 내의 경쟁과 정치, 암투가 존재하며 인생을 살면 살수록 권태, 포만, 노고, 고뇌가 늘어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타인의 행복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나의 행복을 침해하게 될 때 언제든지 그를 불행하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형태의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이다. 



  

    톨스토이의 다음 문장은 이렇게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희생시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모순을 제기한다.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 그에게 소용되는 오직 하나의 것, 그의 생각에는 그것만이 참되게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 그의 인격, 마침내는 사멸되어 뼈가 되고 구더기가 될 것,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는 필요도 없고, 소중하지도 않고, 그가 살아있다고도 느끼지 않는 것, 끊임없이 싸우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물의 전 세계, 그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이며, 영원토록 남아서 살아나갈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유일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 생명, 그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인 생명은 어쩐지 일종의 불가능하고 애매한 것이 되고, 그의 밖에 있고, 그에게는 사랑스럽지 않으며 느껴지지도 않는 한 개의 알지 못할 생명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생명이라는 것이 된다."


    나이가 들어 가며 자신의 쇠퇴를 느끼며 멀지 않게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때, 조금씩 자아의 소멸에 대해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토록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던 나의 자아는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종교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에 따라 이해하는 바는 달라지겠지만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자아는 죽음의 과정에서 이후 어떤 길을 걸을지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점이다. 나의 자아가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세계, 신적 존재, 사람들에 의해 나의 자아는 관계로서 규정되고 기억될 것이라는 것 외에 그 어떤 확실한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아의 행복만을 위해 살았지만, 결국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인생을 살아오며 내가 전부라 생각했던 자아가 아니었다는 점에 톨스토이가 이야기하는 인간생활의 근본적 모순이 있다. 지금껏 걸어온 나 자인의 위선적, 모순적 행동과 겹쳐지면서 참된 생명을 위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 왔는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다시금 나에게 전화를 거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잡으려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감히 생각해본다면, 의지와 상관없이 쇠퇴해 가는 당신의 육체와 자아 앞에서 나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실재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었는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으시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목마름을 완전히 채울 수 없어 나와의 관계를 다시금 기억하시고자 하는 모순에 가득찬 한 인간의 나약한 움직임이 아니었을까. 기억 속 아버지의 얼굴과 그의 안타까운 마음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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